이석영 선생 순국 87년만에 장례식

이상호 선임기자 2021. 2. 16.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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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항일무장투쟁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데 전 재산을 바친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의 첫 추모식이자 장례식이 16일 경기 남양주시 ‘이석영 뉴미디어 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항일무장투쟁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의 첫 추모식이자 장례식이 16일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이석영 뉴미디어 도서관’에서 열렸다.

이석영 선생은 87년 전 중국에서 순국했으나 직계 후손이 없고 유해도 찾지 못해 그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이날 추모식은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최소 인원만 참석했다.

이종찬 이석영 선생 추모식 추진위원장은 기념사에서 “87년 만에 처음으로 그분의 추모식을 거행하는 대단히 가슴 벅찬 날”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이석영 선생은 당대 최고의 재산가로 평생 편안함과 부를 누릴 수 있었으나 나라가 일제에 의해 병탄 되자 결연히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가산을 팔아 망명길에 올랐다”며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투쟁의 간성을 양성하는데 가산을 모두 투자했다”고 추모했다.

이석영 선생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형제들과 결의해 1910년 12월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면서 화도읍 가곡리 땅을 모두 팔아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해방될 때까지 광복군의 주축이면서 청산리 대첩 등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이석영 선생은 1918년 일제의 지명수배로 선양, 베이징, 텐진, 상하이 등으로 피신하며 빈곤하게 생활했다. 그의 가족들은 1927년 일제에 몰살당했다. 이석영 선생은 1934년 2월 16일 상하이에서 80세의 나이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으며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당시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피신 중이어서 임시로 장례를 치렀으나 일제의 공격으로 전란이 격화한데다 직계 후손조차 없어 묘지를 살피지 못했다. 이후 공동묘지 일대가 개발돼 선생의 유해를 찾을 수 없게됐다.

이석영 선생은 1991년 건국훈장을 받았다. 네 번째 등급인‘애국장’에 추서됐다.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순이다. 지난해에는 정부가‘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이상호 선임기자 sh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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