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산 바쳐 광복군 길러낸 독립운동가..87년 만의 뒤늦은 추모식
[앵커]
우당 이회영 선생 가문은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만 14명에 이를 정도로 대표적인 독립운동 명가입니다.
이회영 선생 여섯 형제가 독립운동에 바친 재산은, 현재 가치로 2조 원대로 추산되는데요.
이 독립운동 자금 대부분을 내놓은 6형제 중 둘째, 이석영 선생 87주기 추모행사가 열렸습니다.
선재희 기자와 함께 가보시죠.
[리포트]
새로 지어진 남양주의 도서관에 특별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석영 뉴미디어 도서관.
개관식은 꼭 87년 전 오늘(16일) 변변한 장례식도 없이 이국땅에 묻힌 이석영 선생을 기리는 추모 행사로 치러졌습니다.
[이종찬/이석영 선생 조카손자 : "이 분이 이제야 영혼의 안식을 찾게 되는구나 그런 감동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석영 선생은 우당 이회영의 둘째 형입니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이회영 6형제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기로 합니다.
당시 이석영 선생은 양아버지 이유원에게 남양주 일대의 막대한 땅을 상속받은 직후였습니다.
[황원섭/우당기념관 상임이사 : "(남양주에서) 한양까지 오는 데 80리인데 그 언저리에 전답이 다 이유원 대감(이석영 양아버지) 소유의 땅이었다. (일본 모르게) 몰래 정리하려니 헐값에 넘기죠."]
당시 40만 원은 현재 가치로 2조 원대, 그 돈으로 이석영 선생은 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합니다.
김원봉 등 3,500여 명의 항일 투사가 배출됐습니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의 박해는 극심해졌고,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상해 빈민가를 홀로 전전하며 콩비지로 연명하던 그는 끝내 아사합니다.
아들이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된 후였습니다.
[조광한/남양주시장 : "공동묘지에 묻히셨습니다, 그 묘지가 훼손되어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종이 잠든 홍유릉 앞은 이석영 광장으로 명명됐고, 그의 이름을 딴 독립운동 체험시설도 다음 달 개장합니다.
유해는 찾을 길 없고, 직계 후손도 사라졌지만, 이석영 선생이 추구한 가치는 다시 생명을 얻었습니다.
KBS 뉴스 선재희입니다.
촬영기자:김제원/영상편집:안영아
선재희 기자 ( ana@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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