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 쓸쓸한 서거..87년만에 남양주서 추모식

이상휼 기자 2021. 2. 1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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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산 희사해 독립운동요람 신흥무관학교 창설
의열단 투쟁 장남 가족 일제에 몰살 당하고 차남 행방불명
이석영 선생 © 뉴스1

(남양주=뉴스1) 이상휼 기자 = 1934년 중국 상해의 냄새가 지독히 역한 빈민가의 어느 다락방에서 80세 노인이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한 채 숨졌다.

숨진 노인이 가진 재산이라고는 중국식 '뢰이푸상세이(藍布上衫)' 1벌 뿐이었다. 현지 언론이 취재한 바 그토록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노인은 조선의 거부(巨富)이자 남양주시민 이석영 선생이었다.

당시 선생의 유해를 화장해서 고향 남양주시(당시 양주 가오곡)로 모시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직계 후손이 모두 끊겨 이런 일을 도맡아 할 사람이 없었다. 할 수 없이 홍저우 공동묘지에 안장했는데 도시개발로 유해도 사라졌고, 선생은 그렇게 87년여의 세월 동안 잊혀졌다.

영석 이석영(李石榮 1855-1934) 선생의 서거 87주기 추모식이 16일 오후 남양주시 화도읍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에서 열렸다. 선생이 상해에서 서거하고 고향땅에서 열리는 첫 추모식이다.

추모식은 선생의 약력보고, 추모사, 남양주시립 합창단의 신흥무관학교 교가 합창, 유족대표 인사 순으로 진행됐다. 이번 추모식은 국가보훈처의 후원으로, 코로나19 확산방지를 위해 유족과 남양주시 관계자를 중심으로 간소하게 열렸다.

남양주시립 합창단은 신흥무관학교의 교가를 합창했다. "우리 배달나라에 자손 청년들이라, 두팔 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자유의 깃발이 떴다~"

선생은 1910년 12월 우당 이회영, 성재 이석영 등 6형제와 함께 일가 40여명이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망명한 뒤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해방될 때까지 청산리 대첩 등 독립전쟁의 주역이었으며 광복군의 주축이었다. 광복군 지청천 사령관과 1지대장 김원봉, 2지대장 이범석, 3지대장 김학규 등 광복군 고위 지휘관들이 모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선생은 일제가 '불령선인'으로 지명수배하자 심양, 북경, 천진, 상해 등을 유랑하면서 빈곤하게 생활하다가 1934년 2월16일 상해에서 서거했다.

선생은 당대 굴지의 재산가였던 양부인 이유원 대감의 재산을 상속받아 형제들과 함께 엄청난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경기도 양주에서 한양까지 80리 언저리 전답이 모두 이유원의 땅'이었다고 한다. 이석영 선생 일가는 이 재산을 상속받아 모두 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

이석영 선생은 1918년 일제로부터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명수배돼 서거할 때까지 지하활동을 했다.

1927년 선생의 아들 이규준(항일비밀운동단체 다물단 단장)은 의열투쟁하던 중 일제에 의해 전가족이 몰살됐다. 다물단은 일제의 주요인사들과 '밀정'을 적발해 처단하는 단체였다.

선생의 차남 이규서는 행방불명돼 객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이석영 선생의 후손은 대가 끊겼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핍박은 더 심해졌다. 고립됐던 선생은 1934년 2월16일 중국 상해의 변두리에서 쓸쓸히 숨져 상해 홍교공동묘지에 안장됐다.

87주기 이석영 선생 추모식 © 뉴스1

그의 후손들은 이석영 선생이 서거한 뒤 처음으로 선생의 고향에서 '추모식'이 열리는 점에 대해 감개무량함을 나타냈다.

이석영선생추모식 추진위원회 위원장인 이종찬 전 국회의원(전 국정원장)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로, 이석영 선생은 그의 큰할아버지다.

이 위원장은 "오늘 실로 87년 만에 처음으로 그분의 추모식을 거행한다. 남양주시민의 따뜻한 뜻으로 이제 그분의 위업이 하나씩 복원되고 있다. 나는 직계후손은 아니지만 후손의 한사람으로 남양주시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하늘에 계신 이석영 할아버님께서도 늦게 추모식을 내려보시고 편히 잠드실 것이다"고 추모했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영석 선생은 이 고장에서 성장한 분이다. 당대 굴지의 재산가로 이곳 가오곡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고 평생 살 수 있었음에도, 일제에 병탄되자 결연히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가산을 희사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웠으며 무장투쟁의 간성을 양성하는 데 모두 투자했다"고 말했다.

조광한 시장은 "남양주시 역사의 숨결 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선생의 이름 석자를 곳곳에 새겨놓아 후대에도 영원히 기억되도록 온 마음과 힘을 다하겠다"며 "몹시도 그리워했을 이곳 남양주로 이제야 다시 모셔 영원히 선생을 기억하겠다.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이 선생을 향한 우리의 첫사랑이며 기억이다. 곧이어 시청의 이석영마루, 홍유릉 앞에 이석영광장, 청년창업센터인 1939with이석영 건립으로 지속적으로 선생을 새겨나가겠다"고 밝혔다.

민선7기 남양주시는 이석영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 작업을 시 곳곳에서 추진하면서 잊혀졌던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의 면모가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지난달 화도읍에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이 개관한 데 이어 곧 '이석영 광장', '청년창업공간 1939with이석영' 등이 시민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추모사를 낭독하는 조광한 남양주시장 © 뉴스1

daidaloz@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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