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전노예 피해자, '부실 재판' 인정도, 판사 해명도 끝내 듣지 못했다
"사법부 오류 인정엔 인색한 태도" 지적 나와
피해자 측 "법관 잘못, 근거 있어도 못 따져"
염전 주인들의 노동력 착취로 사회적 공분을 샀던 전남 신안군 ‘염전노예 사건’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이 가해자에 대한 법원의 ‘부실 재판’을 문제 삼으며 국가 배상 소송을 냈지만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패소했다. 사법부의 오류에 대한 책임 인정과 관련해선 법원이 인색한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8-2부(부장 이순형)는 16일 염전노예 피해자인 박모(56)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박씨 측은 염전노예 사건 가해자의 형사 재판에서 조작된 합의서를 근거로 형량을 정한 1심 법원의 책임을 묻고자 이 소송을 제기했다.
사건은 가해자인 염주 A(60)씨의 형사사건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던 2014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1년 1월 A씨는 지능지수(IQ) 43으로 지적장애 2급인 박씨를 유인, 13년 넘게 염전에서 노예처럼 일을 시키면서 노동력을 착취한 혐의(영리유인·준사기·감금·근로기준법위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가해자 선처를" 지적장애 피해자 의사 재확인 안 한 법원
A씨의 1심 선고를 사흘 앞두고, 재판부인 광주지법 목포지원 형사1부엔 피해자 박씨 명의의 처벌불원서가 제출됐다. “A씨 가족이 찾아와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고, 처벌을 원하지 않으니 선처해 달라”는 내용이 기재된 문서 출력본 아래엔 삐뚤빼뚤한 박씨의 자필 서명과 무인(지장)이 있었다. 하지만 서류의 신빙성 입증을 위해 통상 첨부되는 인감증명서나 신분증 사본 등은 전혀 없었다.
사실 이 합의서는 글을 읽지 못해, 그 내용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박씨의 뜻과는 무관하게 꾸며진 거짓 문서였다. 염주의 가족이 박씨가 머물던 노숙인 쉼터에 찾아가서, 보호자가 없는 사이 지장을 찍게 한 뒤 변호사를 통해 재판부에 낸 것이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선고 직전 갑작스럽게 제출된 처벌불원서의 진위를 꼼꼼하게 따지지도 않고 이를 그대로 양형에 반영했다. A씨에겐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이 선고됐다. 특히 임금 미지급으로 인한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에는 “피해자가 처벌불원 의사를 밝혔다”는 이유만으로 사실상 무죄인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졌다.
박씨 측이 국가 배상소송에 나서면서 문제 삼은 부분도, 재판부의 이 같은 ‘진위 검증 부실’ 책임이었다. 당시 이미 재판부에 제출된 증거엔 박씨가 자기 이름만 겨우 쓸 뿐, 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와 있었다. 또 박씨의 임시 후견인이 가해자와 합의에 잘 응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재판 과정에서 이미 알려진 상황이었다고 한다. “재판부가 보다 철저한 검증에 나섰어야 한다”고 박씨 측이 주장했던 이유다.
문제의 처벌불원서가 박씨의 진심과는 무관하게 작성됐다는 점은 그가 A씨의 형사사건 항소심 법정에 직접 출석하고 나서야 인정됐다. A씨 사건 항소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합의는 없었다”고 사실 관계를 정정하면서도, 1심 형량은 그대로 유지했다. 또 검찰이 근로기준법 위반 부분을 항소하지 않아, 공소기각 판결도 뒤집어지지 못했다.
같은 재판부, 다른 지적장애 피해자 재판선 ‘꼼꼼 확인’
박씨의 변호인은 2017년 10월 “가해 염주에 대한 1심 형사 재판부에서 피해자 명의의 처벌불원서가 진정한 의사로 작성됐는지 확인도 없이, 이를 양형에 반영해 정신적인 손해를 입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그러나 국가배상 소송 1심 재판부는 “해당 재판부가 위법·부당한 목적을 갖고 재판을 했거나 직무수행상 준수 기준을 현저하게 위반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는 짤막한 이유만을 제시하고는 박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박씨 측은 즉각 항소했다. 국가배상 소송 2심에선 ‘목포지원 형사1부’의 과실을 증명할 추가 증거도 드러났다. 해당 재판부가 박씨보다 지적 능력이 뛰어난 다른 염전노예 피해자들의 처벌불원서 효력은 인정하지 않았던 사례가 2건 발견된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처벌불원서에는 신분증과 인감증명서, 입회자의 명함까지 첨부돼 있었음에도, 재판부는 피해자들을 직접 법정에 불러 진위를 확인하는 별도 검증 절차를 거쳤다.
항소심에서 박씨 측은 당시 목포지원 형사1부 판사 3명을 증인대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씨 사건과 다른 피해자들 재판의 검증 절차가 달랐던 경위를 따져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재판부가 이를 기각하면서 ‘판사 증인’ 요청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판사들 대신 국가가 내놓은 답변도 “형사소송법상 처벌불원서 진위 확인과 관련한 명시적 규정은 없고, 이는 법관의 자유판단에 맡겨져 있다”는 무심한 설명이었다.
“왜 법관 잘못은 따져볼 기회도 허락 못 받나” 탄식
항소심 재판부는 이날 판결문에서 “범죄 여부를 결정하는 데 필요한 사실에는 ‘엄격한 증명’이 필요하지만, 단지 양형 자료가 되는 데 불과한 사실은 ‘자유로운 증명’으로 족하다”고 밝혔다. 박씨 명의의 처벌불원서는 ‘양형 자료’이므로, 상대적으로 재판부의 검증 책임이 덜하다는 설명이다. 또 A씨 사건 재판 선고 직전에 처벌불원서가 제출돼 해당 재판부로선 그 형식과 내용을 살피는 것 외엔 박씨 진의를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데다, 설사 1심 재판부의 잘못이 있었어도 항소심에서 시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피해자 박씨를 대리한 최정규 변호사는 이날 선고 직후 “국가배상 사건에서 경찰 등 다른 공무원들은 다 잘못을 하면 법정에 불려나오는데, 왜 법관의 잘못은 근거가 있는데도 따져볼 기회조차 허락받지 못하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지적장애인 명의의 처벌불원서는 가해자 측에 의해 왜곡될 여지가 있어 법원의 보다 더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도 강조했다. 최 변호사는 박씨 및 박씨 후견인과의 논의를 거쳐, 대법원 상고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염전노예 사건은 2014년 1월 전남 신안군 염전에 감금돼 노동력 착취와 폭행·욕설에 시달리던 장애인 2명이 구출되면서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이후 정부가 민관합동 전수 조사에 나선 결과, 63명의 피해자가 확인됐고 대부분은 판단능력이 부족한 장애인이나 노숙인 등 사회취약계층인 것으로 밝혀졌다. 13년 넘도록 무임금 노동을 한 끝에 2014년 6월 구출됐던 박씨는 현재 한 노숙인 쉼터에 머물고 있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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