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이탈리아 드라기 총리의 '좌우동거 내각'..독일까, 득일까(종합)
EU 회복기금 첫 시험대될듯..정당간 이견 조율 못하면 위기올수도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유럽중앙은행 총재(ECB) 출신 마리오 드라기 총리가 이끄는 이탈리아 새 정부는 얼마나 오래 생존할까.
드라기 내각이 13일(현지시간) 취임 선서와 함께 국정 운영을 개시하면서 지난 한 달간 이탈리아를 뒤흔든 정국 혼란도 수습됐다.
조용한 성격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드라기 신임 총리는 취임 일성으로 20년 넘게 침체의 덫에 빠진 이탈리아 재건을 약속하며 국민적 기대감을 높였다. 지지율이 70%를 훌쩍 넘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2018년 3월 총선을 통해 구성된 현 의회의 임기는 2023년 3월까지다. 드라기 내각이 국정 운영에 임할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2년 1개월 남짓이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와중에 들어선 드라기 내각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정책 리스크는 물론 정치적 리스크도 국정 운영의 복병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탈리아의 고질적인 정치 불안은 드라기 내각이 1946년 공화국 수립 이래 67번째라는 것만으로 잘 드러난다.
드라기 총리는 거의 모든 주요 정당의 지지 속에 닻을 올렸다.
원내 최대 정당인 반체제 정당 오성운동(M5S)부터 가장 진보적 성향을 가진 자유와 평등(LeU), 오랜 전통의 중도좌파 정당 민주당(PD), 중도를 표방한 생동하는 이탈리아(IV), 중도우파 전진이탈리아(FI), 극우 성향의 동맹(Lega)까지 다양한 색채의 정당들이 내각에 참여했다.
상·하원 의석 수로 따지면 전체 90%가 넘는다. 비교적 의석 수가 많은 정당 가운데 드라기 내각에 반대 입장을 공식화한 곳은 또다른 극우당인 이탈리아형제들(FdI)이 유일하다.
이처럼 의회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내각은 공화국 수립 이래 이탈리아 정치 역사상 처음이라는 말도 나온다.
내각 역시 각 정당의 의석 수에 비례해 짜였다. 전체 23개 부처 장관 가운데 관료 또는 전문가 출신 8명을 제외한 나머지 15명이 각 정당에서 배출한 정치인 출신 장관이다.
정당별로 보면 오성운동이 4명으로 가장 많고 민주당·전진이탈리아·동맹이 각 3명, 자유와 평등·생동하는 이탈리아가 1명씩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무지개 내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의회의 폭넓은 지지는 국정 운영의 큰 동력으로 작용하겠지만 정치적 리스크도 그만큼 커질 수 있다.
정책적 지향점과 지지 기반이 다른 정당들을 조율하고 하나의 목표 아래 융화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가 된 셈이다.
2018년 총선 이후 수립된 오성운동-동맹(2018년 6월∼2019년 8월), 오성운동-민주당-생동하는 이탈리아(2019년 9월∼2021년 1월) 간 연립정부가 2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지금은 2∼3개당이 연정을 구성한 당시와는 상황이 다르다. 최소 6개 이상의 정당이 모인 현 거국내각 특성상 한두 정당이 일방적으로 정권을 흔들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들 정당이 다가오는 총선을 바라보며 전략적인 의도를 갖고 모였다는 태생적 배경과 차기 수권 정당이 되고자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리스크는 여전하다는 분석이다.
드라기 총리가 13일 취임 후 첫 내각회의에서 "정당의 이해관계를 뒤로 하고 국가를 위해 하나로 뭉치자"라고 당부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드라기 내각의 향배를 가늠하는 첫 시험대는 유럽연합(EU)이 회원국에 배분하는 코로나19 회복기금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이탈리아는 전체 기금 7천500억 유로(약 1천6조원) 가운데 보조금·저리 대출 등의 형태로 2천90억 유로(약 280조원)를 받을 예정이다. 회원국 중 가장 많은 액수다.
각 회원국은 4월까지 친환경 경제시스템 구축과 디지털 사회 전환 등 사전에 EU가 제시한 조건에 맞게 기금 사용 계획안을 만들어 EU 집행위에 제출해야 한다.
이탈리아 현지에서는 이를 두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부흥의 밑천이 된 '마셜플랜'급이라는 평가와 함께 국가 운명을 바꿀 절호의 기회라는 등의 들뜬 분위기도 감지된다.
이는 각 정당의 이해가 걸려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정당들은 천문학적인 기금을 어떻게 사용해야 정치적 이득을 극대화할 수 있을지 저마다 주판알을 튕기는 모습이다.
전례 없이 거의 모든 정당이 드라기 내각에 참여하기로 한 것 역시 회복기금 사용 계획에 일정 부분 목소리를 내려는 의도가 자리잡고 있다는 게 현지 정가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전국 지지율 24%로 1위를 달리는 동맹의 마테오 살비니 상원의원은 드라기 내각에 참여하기로 한 이유로 회복기금을 활용한 일자리 창출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회복기금이 드라기 내각을 견인할 국정 동력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내각의 명운을 단축시키는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각 당이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내홍이 불거질 경우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오성운동-민주당-생동하는 이탈리아의 3당 연정이 붕괴의 수순으로 가게 된 단초도 결국은 회복기금 사용 계획을 둘러싼 이견이었다.
현지 전문가들 역시 드라기 내각의 정치적 취약성에 주목하는 모습이다.
이탈리아의 정치 컨설턴트 기관인 '폴리시 소나르'(Policy Sonar)는 최근 공개한 보고서에서 "지금은 허니문 기간이며 이는 향후 몇 달 간 지속할 것"이라면서도 "어느 순간 순풍이 꺾이고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로마 루이스대의 조반니 오르시나 정치학 교수도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드라기 총리가 초반에는 대중적 인기와 신뢰를 바탕으로 무리 없이 정당들을 통제하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반감과 불만족이 표면화할 것이라고 짚었다.
lu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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