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프리즘] 이미 태어난 새것의 정치 / 이재훈
[한겨레 프리즘]
이재훈 ㅣ 사회정책팀장
‘87년 체제’의 시대적 소명은 끝났다. 최근 ‘2.0 선언’을 공식화한 ‘민주평등사회를 위한 전국교수연구자협의회’(민교협)가 내린 결론이다(<한겨레> 2월9일치 5면). 2016년 촛불 때 한국 사회는 세대와 성별, 계급을 막론하고 하나의 목소리를 냈다.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에 담긴 ‘정상국가의 복원’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함께 촛불을 들었다. 분화는 2019년 ‘조국 사태’ 때 시작됐다. ‘87세대’에 속하는 이들은 검찰개혁의 당위성만 앞세우며 ‘조국 지지’ 선언을 했다. ‘포스트 87세대’는 그럴 수 없었다. “조 교수 가족이 드러내준 문제가 한국 교육과 사회 불평등의 핵심에 걸쳐 있고, 이것을 직시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컸다. 부모의 인맥을 통해 스펙을 품앗이하며 학벌을 대물림하는 “지배동맹이라는 구조적 부패”가 드러났는데, “검찰개혁 때문에 그게 묻혀버리는 것이 충격”(천정환)이었던 것이다.
차이는 한국 사회의 지배 권력을 보는 시선에서 비롯한다. 87세대에게 지배 권력은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굳건한 수구 세력이다. 형식적인 민주화가 됐지만 수구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은 여전하고, 그 세력을 앞장서 대변하는 도구가 검찰과 보수언론이라고 여긴다. 포스트 87세대는 87세대만큼 하나로 묶긴 어렵지만, 대체로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세력이 서로 정권을 주고받으며 권력을 분점하고 있다고 여긴다. 이들에게 민주당은 이미 수구 세력만큼이나 기득권이다. 수구 쪽으로 기울어진 기성언론의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고, 유튜브 등 새로운 미디어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들은 앞다퉈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으며, 코어 지지층도 강력하다. 이를 바탕으로 국회 의석수마저 174석(58%)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는 점점 격차가 커지고 있고, 젠더 불평등 문제는 별반 나아질 기미가 없다.
이런 시선의 차이는 김학의 성범죄 사건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87세대는 ‘사람의 성을 뇌물로 주고받으며 인권을 유린한 범죄를 저지른 검찰 고위 공직자와 이를 두차례나 봐주기 수사한 검찰’을 두고 성범죄를 저지른 검찰 고위 공직자와 자기 식구 감싸기에 급급한 검찰에 분노의 방점을 찍었다. 반면 포스트 87세대는 사람의 성을 뇌물로 주고받으며 인권을 유린한 범죄에 조금 더 분노했다. 87세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의 기득권엔 온순하면서 외부 문제에는 똘똘 뭉쳐 칼날을 가는 검찰의 행태를 비판했지만, 포스트 87세대는 권력을 잡으면 권력을 매개로 성범죄를 저지르고야 마는 권력 그 자체를 비판했다. 김학의처럼 권력을 이용해 성폭력을 휘두른 이들은 검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런 사례를 국민의힘뿐만 아니라 민주당 출신 지방자치단체장들과 진보정당 대표에 이르기까지 생생히 보고 있다. 포스트 87세대가 한국 사회의 남성 중심 권력 카르텔이 끊임없는 성폭력을 낳는 ‘구조적 지배동맹’이라고 여기는 까닭이다.
물론 민교협의 2.0 선언과 달리 87세대의 시대적 소명이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건 87세대와 같은 특정 세대의 목소리가 과잉 대표되는 사회가 “실재 시민들의 정치의식”을 왜곡하면서 이 정치의식들이 공론장에 “온전히 표상되지 못하게”(남재일) 막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회는 “위험한 불평등의 시대”를 맞아 “도처에 편재한 계급갈등의 불씨를 정치가 대변하고 정책으로 승화하는 것이 역사적 과제”(신진욱)가 된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삶의 경험을 기저에서 규정하는 가부장제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투쟁에 나서고 있는”(남재일) 여성을 비롯한 성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위축시킨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진정한 위기는 낡은 것은 죽어가는 반면 새것은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고 했지만, 한국 사회는 어쩌면 이미 태어난 새것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억누름이라는 건 권력자만 할 수 있는 행위라는 사실은 모른 체하면서 말이다.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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