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님, 왜 확인 안 하셨나요?
[경향신문]
지적장애로 이름만 쓰는데
“처벌불원서 조작 미확인”
권리 침해 주장 안 받아줘
2심 “주의 의무 위반 아냐”
피해자 측 “대법 상고할 것”
‘염전노예’ 사건 피해자가 판사의 잘못으로 가해자인 염전 운영자의 형사재판이 부실하게 이뤄졌다며 국가배상 소송을 냈지만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패소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8-2부(재판장 이순형)는 16일 원고 박모씨에 대해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1심에서 패소한 박씨의 항소와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른 추가 청구도 기각했다. 박씨 측은 유사한 염전노예 사건에서 정반대 결정을 한 형사재판부의 담당 판사를 증인으로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적장애인인 박씨는 이른바 ‘신안 염전노예 사건’의 피해자로 2001년부터 2014년까지 전남 신안군의 한 염전에서 사실상 강제노역을 하며 지냈다. 이 사건이 알려진 뒤 수사가 시작됐고, 염전 운영자 A씨는 같은 해 5월 영리유인 등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피고인 측은 형사재판 선고 3일 전인 2014년 10월13일 박씨의 처벌불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이 처벌불원서는 노숙인 쉼터에서 지내던 박씨를 찾아간 A씨의 아들이 받은 것인데,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내용이 적힌 종이에 주민등록번호를 쓰고 지장을 찍은 형태였다. 인감증명서 등 통상적으로 필요한 서류는 첨부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A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박씨 측은 당시 재판부가 장애인인 박씨의 처벌불원서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선 더 높은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자신의 이름이나 생년월일을 겨우 쓸 수 있다. 박씨 측은 판사의 잘못으로 피해자로서 헌법상의 권리와 인격권을 침해받았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2018년 판결에서 “조작된 자필 처벌불원서를 판사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지만 법관 잘못으로 인한 국가배상책임은 해당 법관이 부정한 목적이 있었거나 법관이 기울여야 할 주의 의무를 현저히 위반한 경우에만 인정된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항소심에서 박씨 측은 해당 형사재판부가 비슷한 염전노예 사건의 다른 운영자들에 대해 판결한 사건을 살펴봤다. 박씨와 비슷하게 지적장애가 있으면서 처벌불원서를 제출한 사례를 확인했는데, 그중 2개 사건에서 이 재판부는 처벌불원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박씨의 처벌불원서보다 증빙 서류도 더 갖춰져 있고 피해자의 지적장애 정도도 박씨(2급)보다 낮은 3급 피해자였다. 그런데 재판부는 처벌불원서의 진위를 입증해야 한다며 피해자를 법원으로 불러 그 의사를 확인했다. 박씨에 대해선 하지 않은 조치였다.
박씨 측은 문제가 된 형사재판 판사들을 증인으로 불러 박씨의 처벌불원서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경위 등을 물으려 했지만 재판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씨 측 대리인인 최정규 변호사는 대법원에 상고할 계획이다. 최 변호사는 “법관의 잘못에 대해 충분한 근거도 있는데 물어볼 기회도 허락받지 못하고 그냥 패소했다. 공정한 재판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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