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새 대북정책, 제재냐 관여냐..그것이 문제로다-② [한반도 갬빗]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조 바이든 미국 신행정부가 대대적인 대북정책 검토에 들어갔다. 추가 제재에서부터 적극적인 관여정책 모두 검토되고 있는 가운데, 지금까지 미국 정부가 택한 대북정책들의 장·단점을 차근차근 따져보자.
이번 기사는 총 4개의 꼭지로 나눠 준비했다. 트럼프부터 클린턴 행정부까지의 대북정책을 분석하고자 한다. 아울러 바이든 행정부가 고려할 요인들과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하기 위해 고려해야 하는 지점들을 따져본다.
“(북한과 이란, 쿠바를 비롯한 이른바 문제의 국가 지도자들과 조건없이) 만나겠다. 부시 행정부는 이 나라들과 대화하지 않음으로써 벌을 주겠다는 외교원칙을 세웠다. 이건 말도 안된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만날 용의가 있다.”
(2007년 7월 MSNBC 대통령후보 TV토론회에서 오바마 당시 상원의원이 한 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대북정책이라고 하면 대부분 ‘전략적 인내’를 떠올린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가 ‘왜’ 전략적 인내를 택했는지 그 배경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바마 대통령은 세간의 인식과 달리 ‘북한의 체제를 인정하지 않고 대화를 차단하는 접근’을 비난했었다.
오바마 1기 행정부가 설정한 외교원칙은 ‘동맹’과 ‘대화’였다. 동맹국과의 일관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중시했고 적대국이라고 하더라도 외교적 수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게 오바마 행정부의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이 원칙은 한번 정책을 추진할 때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획기적인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고 대외정세에 크게 휘둘리는 경향이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란과의 포괄적공동계획(JCPOA) 핵협정이 오바마 행정부가 이 원칙을 적용해 거둔 대표적인 성공 사례라면 북핵문제는 대표적인 실패 사례라 할 수 있다.
무엇이 달랐을까. 핵심은 바로 ‘대외변수’다. 북핵문제를 다룰 때 미국의 역내 핵심 동맹국이라 꼽히는 한국과 일본을 보자. 오바마 행정부 출범 당시 한국은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은 아소 다로 총리가 이끌고 있었다. 이 때 이 대통령은 북한의 선제적 비핵화 조치가 없으면 경제협력 및 인적교류에 응하지 않는다는 ‘비핵개방 3000’ 구상을 추구하고 있었다. 아소 총리는 한창 진행하고 있던 6자 회담에서 북한을 배제한 대북 고립주의를 추구했다.
북한은 어땠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핵무기 개발을 국가의 핵심과제로 내걸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대한 불신이 오바마 행정부까지 이어진 결과였다. 불신에 가득찼던 북한은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 만에 북한은 장거리로켓을 발사했다.
취임 전까지만 해도 대북 유화책을 고려했던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의 장거리로켓 발사를 계기로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에 맞춰 대북강경으로 돌아섰다.
대화를 차단한 건 아니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물밑 접촉’을 선택했다. 2009년 7월 커트 캠벨 당시 국무부 차관보는 북한과의 전면적인 관계 정상화 외에도 항구적 평화체제, 에너지 및 경제지원 등 포괄적 패키지를 비핵화의 조건으로 제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파견해 억류된 미국 기자들을 빼내오고 북미대화 의지를 내비쳤다.
미국은 북한과의 평화협정 가능성까지 시사했고, 북한도 비핵화 대화에 나설 의사를 내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든 사태가 발생했다. 바로 천안함 폭침사태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오바마 행정부가 ‘전략적 인내’를 언급하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오바마 행정부의 ‘동맹중심’ 대북정책은 전략적 인내라는 소극적인 외교원칙을 탄생시켰다. 오바마 행정부는 동맹국들과의 협의 끝에 주요 대북정책 수단으로 ‘제재’를 택했다.
그렇다고 핵심 외교원칙인 ‘대화’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천안함 사태 이후에도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이 비핵화에 나설 의사가 있다면 경제적 지원을 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북미 고위급 회담과 언론인 교류도 그대로 진행됐다. 2012년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 유예, 우라늄 농축활동 중단과 미국의 대북 영양지원 및 관계 개선을 내건 2·29 합의가 채택될 수 있었던 것도 지속적인 대화시도 덕분이었다.
그러나 합의는 16일 만에 깨졌다. 문제는 북한에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차기 지도자로 떠올랐다. 김정일의 뒤를 이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29 합의안을 파기하는 우주 로켓 발사를 감행했다. 미국 내부에서는 총선 참패, 외교적으로 이슬람국가(IS) 및 대테러와의 전쟁에 시달리고 있던 오바마 행정부로서 2·29 합의는 치명적인 외교 실책이 됐다.
김 위원장은 집권 1년 만인 2013년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을 목표로 한 이른바 ‘병진노선’을 핵심 국정과제로 내걸었다. 재밌는 건 병진노선을 채택한 지 석달 만에 갑자기 미국에 비핵화 대화를 제안했다는 점이다. 2013년 6월 16일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은 중대 담화를 내고 비핵화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이었다고 주장했다. 김 위원장의 리더십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시사한다. 실제 오바마 2기 행정부 즈음해서 김정은 위원장의 장성택 숙청과 참모 처형작업이 진행됐다.
김 위원장의 폭주를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나라는 없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갓 지도자가 돼 미중견제와 국내정치에 집중하고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드레스덴 구상을 발표하며 ‘통일은 대박’ 담론을 펼쳤지만 거창한 레토릭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중국의 관망세와 중국의 대북정책에 기대했던 박근혜 대통령은 대북강경 기조로 전환했다. 아베 신조 총리의 등장은 대북강경 기조를 거들었다.
오바마 대통령도 뒤늦게 ‘최대한의 압박’ 기조를 검토했지만 중국과의 관계와 대화를 근간으로 한 외교원칙을 쉽게 번복하지 못했다. 그 결과, 낮은 수위의 대북제재만이 오바마 행정부의 유일하면서도 어중간한 레버리지가 됐다.
munjae@heraldcorp.com
- Copyrights ⓒ 헤럴드경제 & heraldbiz.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미나리’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
- “아들이 엄마폰 훔쳐 몰래 팔았네요 ㅠㅠ” 당근마켓서 산 중고폰이 도난폰!
- 배성재, 15년 만에 SBS 퇴사 "진심으로 감사했다"
- 김동성 극단적 선택 시도 이유는?…“과도한 사생활 노출” 고통 호소
- “우즈 쾌유 기원” 최종일 우즈처럼 ‘검빨’로 나선 선수들
- 기성용 사건 ‘끝까지’ 간다…“증거 내놔라”vs “원하는 대로”
- 손흥민 2도움…토트넘, 번리 4-0으로 꺾고 2연패 탈출
- 세븐틴 민규, 학폭 주장에 스케줄 중단.."사실 관계 지속 확인"
- 음주운전 중 도로서 잠들어..측정 거부한 30대 집행유예
- '손현주의 간이역' 손현주, 간이역의 정서를 이끌어내는 힐링예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