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감성여행] 나를 만나러 가는 겨울 바다, 덕적도

2021. 2. 16.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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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바다, 덕적도를 향해 이른 아침 집을 나서면서 필자는 시인 양병우의 <겨울 바다에 가는 것은>의 시 전문을 떠올렸다.
                         
겨울 바다에 가는 것은
바로 나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고독을 만나러 가는 것이고
자유를 느끼기 위해 가는 것이다

동굴 속에 머물러 지내다가
푸른 하늘을 보러 가는 것이다

겨울 바다에 가는 것은
갈매기 따라 날고 싶기 때문이다

시린 바닷바람 가슴 가득히 마셔
나를 씻어내고 싶어 가는 것이다.

문득 ‘사람들은 왜 겨울 바다를 보러 떠날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안 그래도 쓸쓸한 바닷가를, 하필이면 춥고 바람이 불어 제대로 운치 있게 걸을 수도 없는 겨울에 보러 가는지……, 이번에는 이 숙제를 한번 풀어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집을 나섰다.
덕적도는 인천항 여객터미널에서 쾌속선을 타고 1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상으로는 꽤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섬이지만 서울 근교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당일치기 여행도 가능한 곳이다. 겨울 여행은 어디를 가도 그리 북적거리지 않아서 좋았다. 특히나 섬은 더 한적해서 덕적도를 향하는 쾌속선에도 승객이 그리 많지 않았다.


덕적면 지역은 기록상으로 우리나라 섬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의 고장이다. 백제가 중국과 교류를 시작한 근초고왕 27년(372년) 이후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강유역을 상실한 개로왕 21년(475년)까지 100여 년 동안 사용되던 해상통로의 거점 지역이 덕적면이었다. 인천 능허대에서 출발하여 덕적도를 거쳐 황해를 횡단하고 중국 산둥반도의 등주 · 내주로 이르는 항로로 오래전부터 중국과의 교류를 위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후 통일신라 시대로 들어오면서 동양의 해상지배권을 장악해 해상왕국으로 등장했던 시대에도 덕적도는 바다로 나가는 관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고려 시대에도 해상활동의 중요한 지역이었다.
면적은 17.66㎢이고 해안선 길이는 37.6km이다. 덕적도는 면소재지 섬으로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2017년 기준으로 1,177세대에 2,03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덕적도(德積島)는 ‘큰물섬’이라는 순우리말에서 유래되었다. ‘물이 깊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라는 의미로 한자화된 덕물도(德勿島)라 불리다가,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섬사람들이 어질고 덕이 많다”하여 덕적도라 칭하게 되면서 한자 그대로 풀이되어 ‘덕을 쌓는 섬’이라 알려져 왔다.

이번 덕적도 여행은 이곳에서 태어나 중학교 3학년까지 덕적도에서 살았던 ㈜코비코코리아 연재화 대표와 함께 둘러볼 예정이었다. 여객터미널에서 내리자 연 대표가 마중 나와 있었다. 낯선 곳을 탐험하는 것도 좋지만 그곳을 잘 아는 사람이 안내하는 여행은 떠나면서부터 마음이 여유로웠다. 연 대표는 1991년 ㈜코비코코리아를 창업한 이래 생활공간의 편리함과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설계와 시공으로 맞춤 주방가구를 생산하고 있는 튼실한 중견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연 대표에게 덕적도가 어떤 곳인지 물었다.

“제가 태어난 곳은 행정구역상으로 덕적면 북2리, 동네 이름은 작은쑥개입니다. 덕적도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는데요, 하나는 원래 덕적도에서 태어나 살아오고 있는 사람들이구요, 그분들은 경치 좋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매우 입지가 좋은 곳에 살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6.25 한국전쟁 당시에 이북 황해도 바닷가 주변에서 피난을 나와서 정착한 사람들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작은쑥개의 인구가 삼천 명을 넘었으며 초등학교 학생 수도 육백 명 정도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덕적도에 초등학교가 3개나 있었으니까요. 쉽게 요약한다면 덕적도는 원주민과 피난민들이 함께 모여서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사는 곳입니다. 피난민의 숫자가 원주민의 다섯 배 정도나 많았으니까요.”
“작은쑥개라는 마을 이름이 너무 예쁘네요. 덕적도에서 경치 좋은 곳을 꼽는다면 어디일까요?”
“다 좋지만 가장 먼저 가보아야 할 곳은 바로 서포리 해수욕장입니다. 이곳은 1970년대 초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모래가 고운 해수욕장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동양의 하와이라고 불렸던 기억도 납니다.”

서포리 해수욕장(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서포리 569-18)은 덕적도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빼어난 풍경으로 서해안 제1의 해변으로 손꼽을 정도로 유명하며, 그 명성만큼 30만 평 규모의 드넓은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주변은 200년이 넘은 해송 숲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곳이다. 서포리 해수욕장을 중심으로 서포리는 1977년 3월에 서해안의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서포리 해수욕장은 한눈에 보아도 무척 넓었다. 길이 3㎞, 폭 300m의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곳은 곱고 넓게 깔린 모래사장이 특징이며 갯바위 위에서 낚시를 즐길 수 있는데 우럭과 놀래미가 잘 잡힌다고 한다. 어쨌거나 여행 처음에 생각했던 숙제를 풀어야 할 바다와 마주 섰다. 날씨는 추웠지만, 단단히 무장하고 바닷가를 거닐었다.

한참을 걷다가 서다가를 반복하다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저 수평선 너머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는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족했다.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며 파도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물보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물론 동해안처럼 파도가 심하지는 않았다. 한순간 섬광처럼 숙제를 풀 문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는 존재, 뭇 시인들의 시감(詩感)을 불러일으킨 겨울 바다에는 추위를 덮어버릴 만한 매력이 듬뿍 담겨있었다. 마음속 상처가 치유되고 뭔가 자유로워진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누가 치유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거대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그러니 겸허하게 살아야겠다, 뭐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로써 겨울 바다를 찾는 이유를 달성한 셈이다.

해변 뒤편에는 ‘소나무의 섬’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소나무 숲 산책로가 있어 삼림욕을 하기에도 좋았다. 수백 그루의 적송 군락에서 산림욕을 할 수 있는 서포리 소나무 숲은 2010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어울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곳은 캠핑도 가능해 캠핑족들이 많이 찾는 장소이기도 하다. 단 사람들이 많이 찾는 성수기에는 홈페이지를 통한 예약은 필수다. 

해변에서 소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찬 삼림욕장을 지나면 바로 서포리 마을이다. 서쪽에 있는 포구라고 해서 ‘서포리’이며 해당화와 야생화가 철 따라 피어나고, 노송이 울창한 삼림욕장과 해변이 아름다운 동네다.
포구를 걸어가면서 삶의 현장과 마주쳤다. 옹기종기 정박해 있는 배들이 멋진 풍광을 연출하고, 군데군데 어망을 손보는 어부들의 손길이 바빴다.

“어린 시절, 제가 태어나고 자란 북리항은 피난민이 들어오기 전에는 매우 척박한 동네여서 사람이 몇 집 없었습니다. 그런데 1.4후퇴 때 황해도에서 피난민들이 밀려들자 면에서는 북리항에 터전을 마련해주었지요. 피난민들은 우선 잠을 자고 먹을 수 있는 오두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차차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연평도 조기잡이, 덕적도 근해에서의 민어잡이, 꽃게잡이를 시작했고 고기가 많이 잡힌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타지에서도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봄철 조기잡이와 민어잡이가 한창일 때는 포구에 배를 댈 곳도 없이 꽉 차 있었지요. 사람들이 많으니 가설극장도 생기고 놀거리, 볼거리가 풍성했습니다. 우리 어린아이들에게는 섬생활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신세계가 펼쳐졌지요.”

연 대표는 한때 그 대단했다는 민어파시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과거에는 수천 척의 어선들이 몰려 민어파시가 열렸을 정도로 북적이던 덕적도였다. 백성민자를 쓰는 민어(民魚)는 예로부터 백성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물고기로 맛이 담백하고 감미롭다. 특히 민어회는 살이 희고 고소하여 단맛이 돌며 얼큰하게 찌개를 끓여도 맛이 좋다. 처음에 민어는 굴업도에서 많이 잡혔다. 굴업도는 조기어장으로 유명했을 뿐만 아니라 1916년 민어 안간망 어장을 개척한 후 민어파시가 형성되어 1920년대 조기와 민어의 주요 어장이었다. 성어기인 매월 7~8월경이 되면 어선이 300척 이상 모여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연 대표의 말에 의하면 얼마나 고기가 많이 잡혔는지 사람은 물론 갈매기도 늘 배터지게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1923년 굴업도에 들이닥친 해일과 폭풍으로 인해 파시촌을 형성했던 130호의 가옥이 파괴되고, 항에 피난해 있던 200여 척의 민어잡이 어선은 모두 조난당하는 큰 재해를 겪었다. 이 사건으로 어업전진기지는 굴업도에서 덕적도 북리항으로 변경되었다. 또 어선에도 변화가 생겨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굴업도 시절과는 달리 대형선단이 무차별적인 민어 포획에 투입되면서 민어의 씨가 마르게 되었고, 결국 덕적도의 민어파시 또한 사람들에게 잊히게 되었다.

이후 덕적도는 민어파시의 옛 명성을 되찾고자 2015년부터 도우선착장의 주차공간을 활용하여 섬 주민들의 주말장터로 운영해오고 있다. 매년 이른 봄(3~4월)부터 10월까지 열리는 장터에서는 신선하고 믿을 수 있는 덕적도산 제철 농수산물이 방문객을 맞이한다.또 2017년부터는 시장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섬 주민들의 마음을 담아 ‘북적북적 덕적바다역시장’으로 이름을 정하고 새단장을 하였다. 깨끗하고 품질 좋은 착한 농수산물은 기본이고 방문객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쉼터를 만드는 한편 소소한 주민공연도 준비하여 모두가 함께 어울리기 위한 노력을 다하고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며 둘러보는 사이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저녁을 먹기 위해 연 대표가 단골식당으로 안내했다. 주문한 메인 메뉴는 우럭 지리탕과 홍어삼합이었다. 김치에 홍합과 삼겹살 수육을 얹어서 먹는데 잘 삭은 홍어의 시큼한 맛이 입안을 톡 쏘았다. 우럭 지리탕은 갓 잡아 올린 우럭을 바로 끓여 먹는데 재료가 워낙 싱싱해 살이 쫀득하게 씹혔고 국물은 정말 시원했다. 그 외 홍합무침도 살이 통통하게 올라 야채와 함께 먹으니 입안 가득 향이 퍼졌다. 옛날 어머니가 정말 좋은 재료는 왕소금만 넣어도 맛있다는 말이 실감 났다. 자연을 그대로 먹으니 비로소 재료 본연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사람과 멋들어진 경치, 맛난 음식과 무르익은 대화로 덕적도의 하루가 저물어갔다.

<글.사진 전정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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