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 87년만에 첫 추모식

이호진 2021. 2. 1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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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인 남양주 화도읍서 사실상의 장례식 엄수
모실 사람없어 상하이에 모셔졌다 개발로 묘지 사라져
전 재산 팔아 신흥무관학교 설립..이회영·시영 선생의 형
이종찬 "그동안 장례식도 열지 못했는데 이제 편히.."


[남양주=뉴시스]김선웅 기자 = 16일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에서 영석 이석영 선생 순국 87주기 추모식이 거행되고 있다. 2021.02.16. mangusta@newsis.com


[남양주=뉴시스]이호진 기자 = 현재 가치로 2조원에 이르는 재산을 처분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타국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독립운동가 영석(潁石) 이석영(李石榮·1855~1934) 선생의 추모식이 순국 87년 만에 16일 경기 남양주시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에서 거행됐다.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남양주시와 국가보훈처가 후원한 첫 공식 추모식에는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이종찬 우당교육문화재단 이사장 내외와 문희상 전 국회의장, 조광한 남양주시장, 황우연 경기북부보훈지청장, 이철영 시의원 등 소수의 인원만 참석해 고인의 넋을 기렸다.

이날 추모식 사회는 KBS 드라마 ‘자유인 이회영’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 역할을 맡았던 배우 정동환씨가 맡아 의미를 더했다.

조선의 거부(巨富)로 알려진 이석영 선생은 1855년 이조판서 이유승의 둘째 아들로, 우당 이회영·성재 이시영 선생의 형이다. 1885년 고종의 윤허 하에 영의정 이유원의 양자로 입양돼 현재의 남양주시 화도읍에 거주했다. 같은 해 증광시 문과에 급제한 이석영 선생은 종2품인 장예원 소경까지 승진했으나 을사늑약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남양주에서 기거했다.

이후 이석영 선생은 현재 가치로 2조원에 달하는 화도읍 일대 재산을 처분하고 생가의 나머지 다섯 형제 가족 40여명과 1910년 만주로 망명했으며, 이듬해에는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해 무력 항일운동의 기반을 조성했다.

그러나 몇 년 뒤 일제에 의해 불량선인으로 지목되면서 은거생활을 이어가다가 1934년 중국 상해의 빈민가 다락방에서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형편으로 지내다 쓸쓸히 눈을 감았다. 이석영 선생의 시신은 당시 고향인 남양주시로 모실 사람이 없어 상해의 홍저우공동묘지에 모셔졌고 이후 중국 내 전란과 개발로 묘지가 사라지면서 유골조차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이자 영석 이석영선생 추모식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종찬 이사장은 “오늘 추모식을 연다고 했지만 돌아가시고 한 번도 추모식이나 장례식을 갖지 못해 선생님이 아직도 구천을 헤매고 계실지도 모른다. 오늘 (사실상의) 장례식으로 선생님이 이제야 영혼을 찾게 되실 것 같아 감사하고 또 감격스럽다”며 기념사 중 벅찬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추모사에 나선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평생 부와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나라가 일제에 의해 병탄되자 모든 재산을 바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말년에는 초라한 빈민촌에서 생을 마감한 영석 이석영 선생에 대해 한민(韓民)지는 그를 ‘일호의 회한이 없는 장자(長子)풍이었던 분’이라고 격찬했다”며 고인의 영면을 기원했다.

조광한 남양주시장도 추모사를 통해 “아드님까지 의열단에서 투쟁하다 일가족이 일제에 몰살당해 후손 한명 남기지 못하셨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선생님이 계셨기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과 지금의 저희들이 있을 수 있었다”며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지금 가치로 2조원이 넘는 1만여 석의 재산과 명문가문인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명예를 뒤로하고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선생님께 가슴 간절한 추모의 마음을 바치며 명복을 빈다”고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이어 “우리는 그렇게 남양주를 떠나셨고 또 몹시도 그리워하셨을 이곳 남양주로 선생님을 다시 모셔 영원히 기억하고자 한다”며 “너무 늦었지만 고귀하신 선생님을 영원히 기억하고 우리시 곳곳에 선생님의 이름 석자를 새겨놓아 후대에도 영원히 기억되도록 마음과 힘을 다하겠다”고 존경의 마음을 전했다.

실제로 영석 이석영 선생은 우당 이회영 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의 둘째 형으로, 만주 망명은 이회영 선생의 제안이었지만 이석영 선생의 재산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개인의 업적은 물론 형제의 독립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렇게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에 투신했음에도 그동안 이석영 선생의 고단한 삶과 업적은 다른 형제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다.

이에 남양주시는 지난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선정된 창작뮤지컬 ‘이석영의 바람의 노래’를 다산아트홀에서 공연한 것을 시작으로 홍유릉 앞 광장을 ‘이석영 광장’으로 명명하고 지난 1월에는 화도읍에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을 개관하고 흉상을 설치하는 등 지역 곳곳에 이석영 선생의 자취를 다시 새기고 있다.

[남양주=뉴시스]김선웅 기자 = 문희상(왼쪽 세번째) 전 국회의장이 16일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에서 열린 영석 이석영 선생 순국 87주기 추모식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2021.02.16. mangusta@newsis.com

☞공감언론 뉴시스 asake@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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