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타워, 도시 미학인가 무모함인가

곽노필 2021. 2. 16.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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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땅값에 갈수록 가늘고 길쭉해지는 건물
1970년대 홍콩이 원조..뉴욕, 호주로 확산
높이 425.5m의 지상 85층 주상복합 아파트 `432 파크애비뉴' 전경. 위키미디어 코먼스



시드니 디자인 공모전 당선작으로 뽑힌 펜슬타워호텔 조감도. Durbach Block Jaggers 제공

비싼 도심 땅값은 건물의 고층화를 부르는 주된 요인이다. 하늘을 찌르듯 치솟은 마천루는 현대 도시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바닥 폭과 건물 높이의 비율(세장비)이 10 대 1을 넘는 건물을 연필타워(Pencil tower)라고 부른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가느다란 연필타워는 뉴욕의 `111 웨스트 57번가'(111 West 57th Street)라는 이름의 초고층 아파트다. 올해 완공 예정인 이 연필타워는 가로세로비율이 24대1로, 바닥 너비는 18m, 높이는 435미터다. 지난해 지어진 건물 중 가장 높은 빌딩으로 인정받은 세계 최고층 주상복합 센트럴파크타워(높이 472미터)도 신입 연필타워로 이름을 올렸다.

연필타워의 원조는 1970년대 세계에서 가장 밀집된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홍콩이다. 한 층에 한 가구만 있는 20층 이상 아파트 개발 붐이 홍콩을 세계 최고의 연필타워 도시로 만들었다. 당시 땅의 소유권자인 영국 정부가 경매를 통해 비싼 값에 개발권을 부여하는 정책을 펼쳤던 것이 연필타워 건축을 더욱 부추겼다.

21세기엔 이 바람이 뉴욕으로 번졌다. 세계 부호들의 돈이 몰리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맨해튼 센트럴파크 인근의 일명 `억만장자의 거리'가 새로운 연필타워 붐의 중심이 됐다. 2014년 높이 306미터의 호텔아파트 복합건물 `원57'(One57)을 시작으로 10여개의 연필타워가 들어섰다.

2000년대에 들어선 홍콩의 연필타워들. 왼쪽은 2001년에 세워진 더 서밋(65층), 오른쪽은 2003년에 세워진 하이클리프(72층). 위키미디어 코먼스

자투리땅만 남아...열차 칸막이객실처럼 작은 호텔 객실

최근엔 호주가 이 대열에 가세했다. 2013년 첫 연필타워가 들어선 이후 네번째 연필타워 건축이 추진되고 있다. 얼마전 시드니 디자인 공모전 당선작으로 뽑힌 연필타워는 이름도 펜슬타워호텔이다. 바닥 너비 6.4미터에 지상 높이 100미터, 지하 34미터다. 가로세로 비율이 16대1로, 완공되면 호주에서 가장 가는 마천루가 된다.

건물을 설계한 업체(Durbach Block Jaggers)는 마천루를 가리키는 표준 용어 `스카이스크래퍼'(skyscraper)로 부르기엔 건물이 너무 가늘다는 이유로, 이 건물을 `스카이 스크래처'(sky scratcher)로 표현했다.

설계자인 닐 더바흐(Neil Durbach)는 영국 일간 `가디언' 인터뷰에서 "바닥이 좁기 때문에 호텔 객실은 거의 열차 칸막이객실처럼 아주 작다"고 말했다. 한 층에 객실(13㎡)이 고작 6개다. 그는 대신 1층엔 널찍한 공용 공간을, 옥상엔 터키식 목욕탕과 수영장을 만들어 좁은 객실을 보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건축 승인이 떨어지면 올해 안에 착공해 2023년 완공할 계획이다.

그가 연필타워를 보는 관점은 "더욱 환상적인 도시의 미래를 상상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시드니대 건축디자인계획대학원 디나 리디누어(Deena Ridenour) 교수는 `가디언'에 "도시에는 이제 큰 구역이 많이 남아 있지 않으며 여러 구역을 합쳐 개발하려면 비용 많이 든다"며 "유일한 방법은 가늘고 높게 짓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로세로비율이 24대1로 가장 높은 뉴욕의 `111 웨스트 57번가\

예전같으면 엄두를 내지 못할 좁은 땅에 초고층 연필타워 건립이 가능해진 건 기본적으로 건축 기술 발전 덕분이다. 건축 재료의 강도가 갈수록 좋아지고, 바람에 견딜 수 있는 능력도 강화되고 있다. 연필타워는 또 독특한 모양으로 도시의 명물로서도 한몫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건축공학적으론 불리한 점이 많다. 강부성 한국건축학회 회장은 "세장비가 크면 기본적으로 바람에 더 많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철근콘크리트 대신 철골을 쓰면 상대적으로 바람에 더 잘 흔들리고 소음 전달률도 높다고 덧붙였다.

연필타워에선 고층 건물을 이용하는 데 핵심 설비인 엘리베이터 설치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기도 어렵다. 이는 건물 이용자의 편의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자투리땅을 이용해 짓는 경우가 많아 공사 현장 접근도 쉽지 않다. 호주 펜슬타워호텔의 경우에도 장소가 비좁아 크레인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업체 쪽은 6층까지는 전통적인 철근콘크리트 구조물 방식으로 짓고, 그 위층은 강철 거푸집 방식으로 지을 예정이다. 거푸집 자체가 구조물의 일부가 된다.

img src='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800/450/imgdb/original/2021/0216/20210216501400.jpg' alt='높이 425.5m의 지상 85층 주상복합 아파트 `432 파크애비뉴\' 전경. 위키미디어 코먼스' />

뉴욕 맨해튼의 초고층 아파트에서 벌어진 일

급기야 뉴욕 맨해튼의 한 연필타워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2015년 완공된 높이 425.5m의 지상 85층 주상복합 아파트 `432 파크애비뉴'가 부호 입주자들과 건축업체 사이의 분쟁에 휩싸였다고 `뉴욕타임스'가 최근 보도했다. 432파크애비뉴의 가로세로비율은 15대1이다. 부동산 웹사이트 `커브드 뉴욕'(Curbed New York)에 따르면 표준 지침을 적용하면 가로세로비율 12대1이 적절한 건물이다.

이 아파트는 2010년대 세계 최상층 부자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 뉴욕 럭셔리 아파트의 정점에서 분양됐다. 분양 당시 펜트하우스는 중동의 석유 억만장자에게 8800만달러(약 970억원)에 팔렸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 아파트 입주자들이 고압 급수관의 누수, 엘리베이터 오작동, 벽체의 삐걱거리는 소리 등으로 큰 불편을 겪고 있다. 이는 이 아파트가 자랑으로 내세운 초고층 건축 방식, 건축 재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타임스'는 분석했다. 값비싼 아파트가 반드시 쾌적한 생활 환경의 보증수표는 되지 못했던 셈이다.

`타임스'가 확보한 건축업체 이메일에 따르면 2018년에 두 건의 대규모 누수 사고가 발생한 데 이어, 2019년 10월엔 강한 바람으로 엘리베이터가 멈춰서는 바람에 한 주민이 1시간25분 동안 갇힌 사고가 있었다. 초고층 건물에는 수압을 크게 올려 물을 공급하기 때문에, 고무 패킹 등 일부에서 조그만 문제가 생겨도 대량 누수가 발생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소음이다. `타임스'는 바람에 건물이 흔들리면서 벽 사이에 설치한 금속 칸막이에서 소음이 발생하고, 엘리베이터 출입구와 통로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는 한 건축업체 관계자의 말을 인용했다. 쓰레기를 통로로 버릴 때 폭탄 터지는 듯한 굉음이 들린다는 불만도 나왔다. 이에 따라 건물 보험료와 수리비가 40%나 상승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는 "일부 엔지니어들은 다른 신축 건물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432파크애비뉴에서 바라본 뉴욕 전경. 탁 트인 전망은 초고층 아파트의 가장 큰 매력 가운데 하나다. 432파크애비뉴닷컴

전망과 수익의 의기투합...주택 공급의 원칙은 뭘까

초고층 아파트의 가장 큰 매력은 입주자에겐 탁 트인 전망, 개발자는 높은 분양가로부터 얻는 수익이다. 곳곳에 초고층 건물 유지를 위한 설비공간들이 있어 건축 공간의 효율은 아무래도 떨어진다. 432 파크 애비뉴의 경우 이런 설비들이 차지하고 있는 설비층 비율이 전체 공간의 4분의1이나 된다. 이는 분양가를 더욱 높이는 요인이다.

한국에선 아직 극단의 가로세로비율을 보이는 본격적인 초고층 연필타워는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의 자산시장 양극화 추세가 심화하고, 여기에 투기적 요소가 결합할 경우 현실화할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건축가 스티븐 제이콥스(Stephen B Jacobs)는 `가디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건물은 가장 부유한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살아가는 경험을 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과제는 정말 필요한 대다수 사람들에게 어떻게 집을 공급하느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기사는 연필타워의 모양을 애초 ‘얇은’에서 ‘가는’으로 표현을 바꿔 수정했습니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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