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영역까지 확장한 젠더 논란
(시사저널=반이정 미술 평론가)
'올해의 작가상'은 국립현대미술관이 매년 한 명의 주목할 만한 미술가를 선발해 시상하는 미술상이다. 2012년부터 SBS문화재단과 공동으로 4명의 후보를 선정해 전시회를 열고 있다. 관객들에게 후보를 두루 살필 시간을 충분히 준 후 최종 수상자 1명을 발표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일종의 서바이벌 긴장을 더해 현대미술에 대한 주목 효과를 높이는 전략으로 권위 있는 국내 미술상 중 하나다.
2020년 올해의 작가상 전시는 지난해 12월초 개막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국립현대미술관이 무기한 휴관에 들어가면서 40여 일 폐쇄됐다가 올해 1월19일 전시가 재개됐다. 이 과정에서 후보에 오른 정윤석 작가의 후보자 지명 철회를 요구하는 전례 없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의 작품이 리얼돌을 소재로 썼다는 게 이유였다. 논란에 불을 지핀 여성단체는 '올해의 시대착오적 작가상에 반대한다'는 제목의 성명서에서 "여성의 신체를 성적 도구화하는 '섹스돌' 내용을 전시한 것은 공공성에 크게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인스타그램에도 비슷한 불만성 댓글이 쏟아졌다.
예술과 외설 사이…
논란이 되고 있는 정윤석 작가의 작품 《내일》은 과연 어떤 내용일까. 《내일》은 리얼돌을 제작하는 중국 공장, 다섯 종의 리얼돌을 파트너로 데리고 사는 일본 중년 남성, 인공지능(AI) 정당을 표방한 2018년 일본의 선거 풍경이 교차 편집되는 2시간 분량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다. 성욕이라는 인류의 본능부터 고도의 정치적 판단까지 '포스트 휴먼화'되는 미래상을 가치중립적으로 조망한 것으로 내겐 보였다.
여성의 알몸을 재현한 인형을 기계적으로 매만지는 중국 리얼돌 공장 여직원들의 무미건조한 작업에선 욕망의 무상함이 읽혔다. 리얼돌 여럿과 동거하면서 "인형이라 질투도 안 하고 나 같은 노인도 상대해 주니 사람보다 낫다"고 말하는 일본 60대 남성의 고백은 무한한 가치로 추앙되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자문하게 만들었다. 혹여 그의 작품이 인간의 욕망에만 집중했다손 치자. 욕망 자체를 죄악시하며 후보자 철회를 요구하는 이들의 입장은 그들이 세상에 태어난 원점을 부인하는 자기모순이 된다. 그들은 두 남녀가 지고지순한 마음으로 두 손을 맞잡으면 2세가 탄생한다고 믿는가 보다.
이처럼 다양할 수 있는 해석의 겹은 아랑곳하지 않고, 리얼돌 소재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 혐오'라고 귀결시키는 해석을 따르자면, 범죄영화나 조폭영화는 범죄와 조폭을 미화한 작품이 될 테다. 한 겹짜리 해석의 틀을 통과하면 제재의 대상은 무한 수로 늘어나게 된다.
정윤석의 영상에 등장하는 리얼돌을 본 누군가는 불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취향과 신념의 차이가 만든 누군가의 불편이 만인의 시선에서 해당 작품을 제거하라는 요구로 연결될 순 없다. 당신이 보기 싫다면 당신만 그걸 안 보면 된다. 후보자 철회를 요구하는 이 정당의 성명서를 보니 향후 미술상 후보자의 선정 기준까지 제시해 놨다. 전가의 보도가 된 '성인지 감수성'을 선정 기준으로 삼아 달라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을 자신의 신념에 봉사하는 도구로 간주하는 태도는 우파 파시즘과 좌파 전체주의가 예술을 대했던 전철을 규모만 다를 뿐 똑같이 밟고 있다.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모두가 보도록 만들고야 마는 예술관.
리얼돌을 여성 혐오와 성적 대상화로만 연결시키는 확증 편향에 대해, 공교롭게 최근 사법부의 판결이 나왔다. 올해 1월 올해의 작가상 전시가 재개되고 후보자 철회가 재점화됐을 무렵, 법원은 리얼돌 수입을 허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는 2019년 대법원 판결 취지와도 같았다. 대법원 판결문은 이랬다. '리얼돌이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왜곡할 만큼 노골적 방법으로 성적 부위나 행위를 적나라하게 표현 또는 묘사한 것이라 볼 수 없고, 성인의 사적이고 은밀한 사용을 본래 목적으로 한 성기구의 수입 자체를 금지할 법적 근거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
백번 양보해 2년 전 대법원의 판결과 올해 법원의 판결이 일부의 신념처럼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된 판결이었다 치자. 그럴 경우 여성 혐오와 성적 대상화의 낙인이 찍힐 시각예술은 수두룩하게 쌓이게 된다. 연령 제한이 없는 서양 명화집의 무수한 누드화는 모두 여성 혐오와 성적 대상화를 반영한 유구한 고전의 계보에 낄 판이다.
이 사회에 젠더 갈등이 점화되던 2017년 초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얼굴을 서양 누드화에 합성한 풍자화 《더러운 잠》이 국회에서 전시됐다. 여성단체들은 이 그림을 여성 비하이자 성희롱이라고 주장하며 전시를 주최한 표창원 의원의 중징계를 요구했다. 얼굴 부위만 박근혜의 얼굴로 교체한 풍자화의 원작은 초등학생도 볼 수 있는 명화집에 수록된 르네상스 시대 누드 명화일 뿐이었다.
좋은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 표현의 자유와 검열 사이의 관계에서 검열 주체는 공권력이었다. 이 관계가 역전된 때는 2015 페미니즘이 유행하면서다. 의견이 다른 측을 입 다물게 하는 문화가 정치적 올바름을 앞세워 일각에서 자리 잡았고, 기관이 오히려 시민단체의 요구에 눈치를 보게 됐으니까. 취향과 신념이 다른 모든 이를 충족시키는 좋은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예술을 계도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신념의 집단까지 만족시킬 좋은 예술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존재해서도 안 된다.
예술작품에는 제작자만의 의도가 포함되기 마련이지만, 외부의 간섭이 더해진 이번 소동을 통해, 정윤석의 의도나 후보자 철회 요구자들의 의도와는 별개로 전혀 의도치 않은 새로운 해석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의견이 다른 이를 해석의 폭력으로 짓밟는 문화가 이젠 정치·사회를 넘어 예술의 영역까지 침범했다는 해석 말이다.
후보자 철회를 두둔하는 일부 매체를 보니 '빗발치는 항의'라는 표현을 썼다. 이 표현은 일견 맞다. 요 몇 년 사이 젠더 이슈로 주도권을 잡으려는 이익단체와 그런 선동에 가담하는 다수의 익명이 결사체로 공존하는 광경이 국지적인 소나기처럼 나타난 점에서 말이다. 장마철 집중호우에 추경예산 편성하듯 소나기에도 똑같이 대처할 순 없다. 소나기는 지나가길 기다리는 게 능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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