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나, 베를리너 여우야!"..여우와 함께 사는 법
■"나? 베를리너야!"
퇴근길이었습니다. 주차하고 집으로 향하는데 거리 쓰레기통 근처에서 동물 한 마리가 움직임을 멈추고 제 쪽을 보고 있었습니다. 개인가 싶었는데 주인도 곁에 없고, 일단 생김새가 달랐습니다. 날렵한 몸매에 풍성한 꼬리털, 뾰족한 코와 귀, 아무리 봐도 여우였습니다. 제가 다가가자 빤히 저를 주목하면서 슬슬 근처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전화기를 들고 사진을 찍어두려 했지만, 그보다는 여우가 빨랐습니다.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 여우라니. 한국에선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었던 여우인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베를린 여우는 아주 유명한 존재였습니다. 교민들의 블로그 등에서도 여우 목격담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공원에서 여우를 봤다는 사람은 흔할 정도였고, 집 마당까지 들어온 녀석도 있다는 겁니다. 한 교민은 마당에 둔 고양이 사료를 여우가 당당히 먹어치우고 여유롭게 갈 길 가더라는 얘기도 해주셨습니다.
이 정도면 개체 수가 상당하다는 얘기겠죠. 검색을 해봤습니다. 베를린에 사는 여우 관련 기사도 어렵지 않게 검색이 됐고, 시청 홈페이지에서도 여우 관련 페이지를 찾았습니다. 한 기사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여우가 당신에게 다가와 바짓단을 물고 흔들며 애교를 부릴 수도 있다. 여우는 우리와 가까이 있고, 애완동물처럼 군다." 기사의 결론은 "여우가 '제 갈 길'을 가도록 큰 소리를 내라"고 말합니다. 여우는 여우, 야생동물이라는 거죠.
시청 홈페이지의 내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우의 생태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면서 '사람이나 애완동물을 공격하지도 않고 광견병 우려도 없지만, 먹이를 주거나 직접 접촉하진 말라'고 당부합니다. 길들이려 하지 말고 야생의 상태로 두라는 겁니다.
■"왜 베를린에 사느냐고? 살기 편하잖아!"
현지 기사 등에 따르면 베를린 시내에 사는 여우는 1,700~2,000마리에 달한다고 합니다. 인구 380만 명의 대도시에 상당한 개체가 사는 겁니다. 여우가 베를린에서 개체 수를 늘릴 수 있었던 이유, 가장 큰 건 역시 녹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위의 표를 보면 녹지(공원, 주말 농장 등)가 전체 면적의 12.2%(연두색), 숲이 18.1%(녹색)입니다. 거기에 강이나 호수, 농장까지 합하면 녹지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이 전체의 41.1%에 달합니다. 베를린에 있는 템펠호퍼 파크, 티어가르텐, 폴크스파크 융펀하이데 공원은 모두 200ha가 넘는 공원입니다. 여의도 면적이 290ha(2.9㎢)라고 합니다. 공원에서 곰이라도 살 것 같은 규모이긴 하죠.
녹지가 많으니까 먹이활동이 그만큼 용이합니다. 여우는 과일부터 설치류까지 닥치는 대로 먹는 잡식성 동물입니다. 게다가 사냥을 하지 않고도 쉽게 먹이를 구할 수 있습니다. 쓰레기통이죠. 제가 목격했던 그 녀석도 쓰레기통을 뒤지는 중이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천적이 없습니다.
늑대 같은 대형 갯과 동물도 없습니다. 베를린에서 여우의 천적은 자동차 정도일 겁니다. 사람들은 여우를 '불가근불가원'하죠. 여우들도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 외에 사람들에게 잘 다가서진 않는 것 같습니다. 단, 사람에게 먹이를 받아 먹어봤던 녀석들은 다르다고 하네요.
■"여우와 함께 사는 법"
우리나라에서 여우는 예전에는 굉장히 흔한 동물이었던 것 같지만 1980년대에 멸종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멸종의 이유는 명확지 않습니다. 쥐약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긴 합니다. 1960~70년대 전국에 쥐잡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쥐약을 먹은 쥐를 여우가 먹고 함께 죽었다는 겁니다. 또 여우 목도리를 위한 포획과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서식지 파괴 등이 종합적으로 영향을 줬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우만큼 쥐를 많이 잡아먹는 족제비나 너구리는 멸종되지 않고 잘 살아 있는 걸 보면 꼭 쥐약 때문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서울 같은 대도시라면 몰라도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서도 여우가 사라졌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종이 한 지역에서 갑자기 사리진 것과 다름없는 거죠. 멸종위기동물 1급인 한국 여우는 현재 소백산 일대에서 복원 작업이 한창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멸종위기종 복원 작업 중 반달곰처럼 성과를 거둔 동물도 있고, 여우처럼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동물들도 있습니다. 이런 작업들은 단순히 사라진 동물을 되살려내는 게 아니라 생태계의 복원입니다. 사람과 동물이 자연 속에서 조화롭게 사는 '복원'입니다.
베를린 시는 마당에 굴을 파고 사는 여우가 있다면 임신기와 출산기에 큰소리를 내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집에 아이가 있다면 혹시라도 병이 옮을 수 있으니 여우의 배설물을 발견하면 즉시 치우라고 말합니다. 여우와 함께 사는 법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김귀수 기자 (seowoo10@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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