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왜 그 뉴스를 만들었나" 되묻는 나라
2010∼2011년 겨울 이후 10년 만에 찾아온 추위 속에 유난히 많은 눈이 내려 핀란드 전역이 얼음과 눈 세상으로 변했다. 아파트 어귀와 거리 모퉁이마다 수미터씩의 눈 언덕이 생겼고, 하얗게 눈 덮인 호수와 침엽수림은 아름답고 신성한 빛을 뿜어낸다. 엄청난 규모의 눈이 날마다 내려도 새벽 5시만 되면 지자체와 연간 계약을 맺은 업체 직원들이 다양한 형태의 기계 차량을 끌고 와 큰길, 작은 길 할 것 없이 아파트 현관 앞까지 말끔하게 눈을 치워놓는다. 그렇게 코로나 팬데믹 속에도 북구의 겨울 일상은 별일 없다는 듯이 굴러간다. 그런데 눈 치우는 차량 소리보다 먼저 새벽의 도착을 알리는 것이 있다. 바로 아침 신문이다.
15살 이상 90%가 신문 읽어
핀란드 사람들의 하루는 큰 컵에 진한 커피와 우유를 따른 뒤 아침 신문을 읽으면서 시작된다. 흥미롭게도 핀란드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신문열독률에서도 15살 이상 인구의 90%가 신문을 읽을 정도로 세계 최고를 기록 중이다(2021년 1월 통계). 최근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인쇄된 지면보다 디지털 신문을 읽는 비율이 많이 늘었지만 신문열독률 자체는 계속 높게 유지된다. 필자 역시 박사과정 유학 시절부터 정기구독하는 전국 정론지 <헬싱긴 사노마트>를 펴들고 핀란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제 기사들과 사설, 칼럼, 독자 의견 등을 훑으면서 하루를 시작해왔다. 그런데 어제는 신문을 다 읽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데 뒷면의 전면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석간 타블로이드 <일타 사노마트>가 이번주(2월1∼5일) 전국에서 실시되는 ‘뉴스 주간’을 맞아 민주주의 특집판을 발간했다는 내용이었다.
<헬싱긴 사노마트>와 달리 황색 저널리즘에 가까운 신문이 민주주의 특집판을 냈다니 궁금함이 생겨 인터넷으로 접속했다. 18면으로 제작된 특집판은 “시작은 고통스러웠다”는 제목으로 민주주의는 자명한 것이 아니며, 인류 역사상 다수는 민주주의를 겪지 못했고, 지금도 아주 많은 인류가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대문에 내걸었다. 기사는 로마공화정을 무너뜨린 카이사르부터 2021년의 미국의회 의사당 공격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경쟁자들의 역사를 일별했다. 사설은 민주주의의 기초는 신뢰라는 점을 강조하며 증오와 편견을 줄이고 협력과 신뢰를 늘려갈 것을 주장했다. 10면은 “핀란드 대 미국 민주주의 경기”라는 제목으로 두 나라의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특징을 입체적 사진, 그래프와 함께 비교 분석했다. 12면부터 15면까지는 정치에 참여하는 다양한 정당 소속 핀란드 청년들의 사진과 이야기를 실어 소개했다. 흥미롭게도 사민당, 중앙당, 국민연합당, 녹색당, 좌파동맹 등 원내 정당은 물론 해적당, 페미니즘당, 동물권당 등 다양한 소수정당 활동가의 이야기를 함께 전했다. 청년들이 침묵하기로 결정하면 민주주의의 종말이 시작된다는 내용의 칼럼도 실렸다.
최대 미디어 교육 이벤트 ‘뉴스 주간’
내친김에 2021년 뉴스 주간에 관한 정보를 더 찾아보았다. 핀란드는 1995년부터 신문연맹의 주관으로 매년 ‘신문 주간’ 행사를 벌였는데, 최근 신문연맹이 뉴스미디어연맹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올해부터 행사도 ‘뉴스 주간’으로 바뀌었다. 전국 언론사들과 학교들이 협력해 벌이는 핀란드 최대의 미디어 교육 이벤트로 아동, 청소년에게 비판적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역량의 함양, 자신의 미디어 생활에 대한 성찰, 민주주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능동적 참여를 위한 도구를 제공한다.
2021년의 주제는 거짓 정보의 확산을 막고 무엇이 진실인지 명확히 인식하기이며, 이를 위해 신뢰할 만한 정보와 책임 있는 언론의 특징에 대한 토론을 장려한다. 실제로 많은 신문사가 뉴스 주간 특집판이나 별도의 기사들을 만들어 무료 배포했다. 학교에서는 이를 활용해 다양한 교과수업에 접목하거나 주제 수업을 벌이는데, 뉴스 주간 온라인 플랫폼에는 수백 건의 기사와 관련 질문 목록이 과목, 연령, 주제별로 분류해 공개돼 있다.
핀란드는 초등학생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이고, 우수하며, 체계적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실시해온 선진국으로 명성이 높다. 1950∼60년대부터 일찍 미디어 교육을 시작했고, 1972년부터 국가 교육과정에 미디어 교육을 포함시켰다. 2016년부터 적용된 새 교육과정은 범교과 미래역량 7가지를 설정했는데 미디어 리터러시를 비롯한 다중 문해역량이 포함됐다. 이에 따라 핀란드 초중고 사회 교과서에는 민주주의에서 언론 자유의 중요성, 제4부로서 미디어의 권력과 기능, 책임 있는 저널리즘과 기자 윤리,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해석의 중요성 등과 관련한 내용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유형의 미디어 정보를 접할 때 출처의 신뢰성 판단을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도록 한다. “누가 텍스트, 이미지, 소리 또는 애니메이션을 생산했는가?” “왜, 어떤 의도로 콘텐츠가 만들어졌는가?” “콘텐츠가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 “어느 미디어에서 결과가 출판됐는가?” “다른 미디어에서 같은 이슈에 대한 정보가 발견되는가?” (Forum: Yhteiskuntaoppi 9) 나아가, 해당 챕터에는 다음과 같은 과제가 제시된다. 1. 어떤 요소들이 미디어의 중요성 및 미디어 이용 시간을 확대했는가? 2. 다음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라: 자유로운 미디어는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다. 3. 다음 주장을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근거를 찾아라: 미디어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있다. 4. 다음 미디어들의 신뢰성에 대해 평가하라. 1) 신문 2) TV 뉴스 3) 유튜브 4) 인터넷 토론 포럼. 5. 다음 주장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취하라: 이미지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사회 교과뿐만 아니라 국어 교과에서도
더욱 인상적인 것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사회 교과에만 국한되지 않고 국어(문학) 등 다양한 과목에서 다뤄진다는 점이다. 예컨대, 핀란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는 첫 장부터 미디어에 관해 중점 조명한다. 구체적으로 미디어의 원칙, 저널리즘 스토리와 이미지 유형, 미디어 윤리, 광고, 이미지 분석과 해석 등의 주제에 대해 50여 쪽에 걸쳐 상세한 내용과 풍부한 시각 자료를 배치해 서술한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시민들의 언어생활은 무엇보다 신문, 방송, 광고, 영화, 소셜미디어 등 다양한 미디어 텍스트와 이미지를 읽고, 이를 적절히 해석·토론·활용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국어 교육이 문학과 어법 등에 초점을 둔 표준적 접근을 넘어 갈수록 중요해지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적극 포함해야 하는 까닭이다.
핀란드에선 2월 첫 주 뉴스 주간이 끝나면 바로 ‘미디어 리터러시 주간’이 이어지며, 전국적으로 50여 단체와 교육기관이 협력해 청소년을 비롯한 시민들의 미디어 리터러시 증진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전개한다. 가짜뉴스, 여론 파편화, 정치 양극화가 심화하는 이른바 ‘탈진실 시대’에도 신문 읽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 책임 있는 미디어 저널리즘을 구현하며 시민들과 소통하는 언론사, 우수하고 체계적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어우러져 핀란드가 ‘민주주의의 겨울’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서현수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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