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이겨낼 촉감을 가진 식물에게 좌절은 없다

한겨레 2021. 2. 16.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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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고진하목사의 불편당 일기]불편당 일기 18: 돌콩

사진 픽사베에

산과 들엔 가을빛이 완연하다. 우리가 걷는 마을 둘레길 옆으로 펼쳐진 다락논에는 볏잎들이 누렇게 물들기 시작하고, 알알이 여물어가는 이삭들도 조금씩 고개를 떨구고 있다. 멀리 보이는 명봉산의 나뭇잎들도 울긋불긋 채색을 바꾸고 있다. 둘레길을 함께 걷던 아내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길옆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신기하다는 듯 소리친다.

“당신도 들었죠, 콩 꼬투리 터지는 소리…?”

나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내의 눈길이 향하는 쪽을 바라본다. 타닥, 탁, 타닥… 소리 나는 쪽을 보니 길옆의 돌콩 꼬투리 터지는 소리가 맞다. 꼬투리 터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조그만 콩알들이 길바닥으로 사방 흩어진다.

“저 소리가 내 귀엔 ‘날 좀 봐요!’하는 소리로 들려요.”

“자기 존재를 알아달라는 소리?”

“그런 셈이죠.”

“아하, 그럼 요 조그만 녀석들이 우리가 오는 걸 알았단 말이네?”

“시골 농부들이 그러잖아요. 나락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농부들이 이런 얘기를 하는 까닭은, 논밭에서 자라는 곡식은 주인의 부지런함과 정성에 따라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농부들은 자신들의 발걸음이 최고의 비료라는 자부심으로 부지런히 논밭을 드나들며 나락을 돌본다.

“그래요. 논밭의 나락만 아니라 잡초 취급을 당하는 저 돌콩도 우리 발소리를 분명 들었을 거요.”

그렇다. 아내가 말한 것처럼 최근의 식물학자들은 식물도 청각 기능이 있다고 설파한다. 농사를 짓던 우리 조상들은 직감으로 알았겠지만, 식물학자들은 오랜 연구를 통해 그것을 알아낸 것. 물론 식물이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처럼 귀[外耳]를 갖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귀가 없는 식물이 어떻게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사실 동물들 가운데 귀를 갖고 있지 않은 뱀이나 각종 벌레, 그 밖의 많은 동물들이 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듣는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식물들도 이 귀를 갖지 않은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체내에 진동을 전달할 수 있는 훌륭한 기구를 진화시켰다.”(스테파노 만쿠소 • 알렉산드라 비올라, 『매혹하는 식물의 뇌』)

이 대목에서 나는 서부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이 문득 떠오른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땅바닥에 귀를 대고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를 듣는 장면 말이다. 하여간 식물, 뱀, 두더지, 벌레 등은 바로 이런 방법을 통해 소리를 듣는다. 땅은 소리를 매우 잘 전달하는 매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식물은 자기 몸에 분포되어 있는 ‘기계수용채널’(mechanosensitive channel)을 이용하여 땅의 진동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 이 기계수용채널은 식물의 전신에서 골고루 조금씩 발견되지만, 그것이 가장 많이 분포된 곳은 표피 세포라고 한다. 인간의 청각이 귀에 집중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식물은 그 몸의 지상부와 지하부를 통틀어 수백만 개의 미세한 청각으로 뒤덮여 있는 셈. 따라서 식물은 온몸으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책에서 읽은 이 얘기를 들려주자 아내는 전적으로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생명은 참 경이롭고 신비로워요.”

우리는 자기 존재감을 알려준 돌콩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 허리를 굽혀 길바닥에 흩어져 있는 돌콩을 줍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 터지지 않은 돌콩의 꼬투리도 채취해 비닐봉지에 담았다. 돌콩을 채취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말했다.

“국선도 창시자인 청산 거사가 높고 깊은 산에서 수도를 할 때 생식을 했는데, 솔잎과 칡뿌리, 그리고 이 돌콩을 먹었다지요!”

돌콩 사진 불편당 제공

젊어서 국선도에 심취했던 아내는 청산 거사에 대한 기억이 무척 애틋한 모양이다. 나도 아내가 한 이야기를 오래전에 송기원의 『청산』이란 소설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현대의 신선으로 불리는 청산 거사의 수련기를 소설형식으로 쓴 글인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청산 거사가 깊은 산에서 구할 수 있는 야생의 식물로 생식을 하며 도를 닦다가 화식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마을 가까이 내려오면 악취를 견딜 수 없어 구토를 했다는 내용이다. 하여간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돌콩 같은 야생의 먹거리에 더 깊은 관심을 쏟게 되었다.

돌콩! 식물 이름 앞에 ‘돌’이라는 접두사가 붙으면 일반 종에 비해 작거나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야생에서 자라는 식물을 뜻한다. 돌콩은 우리가 흔히 먹는 콩의 원조로 여겨진다. 콩과 식물은 전 세계에 1만 3천 종이나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92종이 분포한다.

돌콩은 1년생 초본의 덩굴식물인데 종자로 번식한다. 우리나라 각처의 산과 들에서 자생하는 한해살이풀. 토양의 비옥도에 관계없이 반그늘 혹은 양지에서 잘 자라는데, 키는 약 1〜2m 정도다. 일반 콩과 달리 덩굴식물인 돌콩의 줄기는 주변의 풀이나 나무를 타고 올라가 자라는데, 줄기에는 갈색의 털이 빽빽이 나 있다.

잎은 어긋나며 깃꼴 삼출복엽(三出複葉)이다. 삼출복엽이란 잎자루가 끝에서 세 개로 갈라지고 그것이 다시 세 개씩 갈라지는 잎을 말한다. 잎자루는 길이가 7~15㎝이고 짧은 털이 있다.

꽃은 7~8월에 홍자색으로 피며 크기는 약 0.6㎝ 정도 된다. 다른 콩과 식물처럼 나비를 닮은 작은 꽃들이 뭉쳐서 핀다. 가까이서 보면 아주 예쁘다. 열매는 길이 2~3cm 정도로 털이 많고 일반 콩의 꼬투리와 비슷하다. 종자도 타원형이나 신장형으로 작지만 콩알과 비슷하다. 열매가 익으면 꼬투리 속에 든 2~3개의 종자가 탁탁 튀어 나온다. 종자를 채취하려면 평소에 잘 관찰했다가 꼬투리가 터지기 전에 채취해야 한다. 꼬투리가 터진 뒤에 사방 흩어진 종자를 주우려면 모래에서 사금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니까.

돌콩은 씨앗이 일반 콩들에 비해 훨씬 작지만, 약성은 일반 콩과 비교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돌콩은 지방유, 단백질, 탄수화물, 비타민 같은 성분이 풍부하다고 알려져 있다. 원기가 부족해서 일어나는 일체의 병증을 치료하며, 눈을 밝게 해주고, 심장병, 고지혈증, 동맥경화, 당뇨 등 성인병 예방에 좋다고 한다. 또 비장을 튼튼하게 하는 효능이 있어 소화력을 증진시키고, 식은땀을 흘릴 때도 대추와 같이 달여서 복용하면 그 효능이 매우 좋다.

우리 집에서는 돌콩이 꽃을 피운 뒤 열매가 막 맺히기 시작할 무렵 돌콩의 잎과 줄기와 꼬투리까지 채취하여 해마다 차를 덖는다. 그런데 이 채취 시기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말이나 9월 초중순이라 차 만들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때를 놓치면 차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구슬땀을 쏟으면서 재료를 채취하고 가마솥에 불을 피워 차를 덖곤 한다. 정성껏 잘 덖어 놓으면 차 맛이 매우 구수해서 누구나 좋아한다.

돌콩 잎으로는 장아찌도 해먹을 수 있는데, 어린잎을 뜯어 깨끗이 씻어서 깻잎처럼 된장에 박아놓으면 된다. 또 돌콩잎으로 찜을 해 놓아도 한여름 밥상이 풍성해진다. 재료를 깨끗이 씻어서 그릇에 담고 날콩가루를 섞어 찜기에 쪄서 맛간장 등의 양념 재료를 넣고 무치면 된다. 이렇게 요리해 놓으면 콩잎에서 나는 비린내가 안 나고 고소하고 부드러워 반찬으로 먹는 데 전혀 부담이 없다.

가마솥에 덖는 돌콩. 사진 불편당 제공

돌콩 열매는 가을에 채취해 말려 두었다가 차를 만들어 마실 수도 있다. 깨끗이 씻어 말린 돌콩을 프라이팬에 천천히 잘 볶아서 끓는 물을 부어 마시면 된다. 잎과 줄기를 덖어둔 것이 있으면 같이 섞어서 차로 만들어 마실 수도 있다. 이 차를 마셔본 이들은 누구나 그 구수한 맛을 잊지 못한다.

이처럼 먹거리로도 손색이 없고 약성도 좋은 돌콩을 시골 농부들은 여전히 제거해야 할 잡초로 취급한다. 돌콩은 이런 지독한 푸대접을 받으면서 어떻게 생명을 이어올 수 있었을까. 앞서 인용한 스테파노의 책에서 나는 그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돌콩 같은 덩굴성 식물은 ‘능동적(자발적) 촉각’으로 자기 앞에 닥치는 장애를 넉넉히 극복해 낸다는 것. 아니, 식물이 촉각을 지니고 있다고? 그렇다. 스테파노는 식물도 인간처럼 오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촉각 역시 대부분의 식물들이 보유하고 있는 감각이라고 한다. 특히 돌콩 같은 덩굴성 식물은 자발적으로 외부의 물체를 더듬어 그로부터 정보를 입수해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 이 여리디여린 식물은 뭔가에 자기 몸이 닿는 순간 민감한 덩굴손을 많이 만들어 몇 초만에 자신과 접촉한 물체를 휘감고 올라간다는 것. 그러니까 돌콩은 주위의 식물들을 자기의 성장 지지대로 이용하는 것이다.

만일 돌콩에 이런 능동적 촉각이 없다면, 다른 식물들에 짓눌려서 햇빛을 쬐지 못해 자라지도 못할 것이다. 예컨대 키 큰 직립 식물인 옥수수밭 속에 난 돌콩은 옥수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어 성장이 멈춰버릴 것이다. 그러나 돌콩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촉각을 통해 키 큰 직립 식물의 그늘에 갇히지 않고 덩굴손을 뻗어 직립 식물을 타고 올라가 태양 에너지를 넉넉히 흡수해 성장할 수 있는 것. 이처럼 능동적 촉각을 지닌 돌콩 같은 식물에겐 좌절이나 절망은 없다. 삶의 장애 앞에서 너무도 쉽게 좌절하고 절망하는 우리 인간은 이런 식물을 스승으로 모시고 장애를 헤쳐 나가는 슬기로운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그 동안 인간들은 오감뿐 아니라 육감(六感 : 영적 감각)까지 지녔다고 뽐내오지 않았던가.

글 고진하 목사 시인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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