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사고에 미래 꺾인 '바다청년'..피해자 배려는 없었다

지형철 2021. 2. 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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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의무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일, 이 극단의 표현 사이에 병역의 의무가 존재합니다. 입대를 고의로 피했다가는 처벌이 따르듯 병역은 대한민국 남성에게 피할 수 없는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의무를 따르는 개인에게 군은 어떤 모습일까요. 안전하고, 부당하지 않으며, 문제가 생겼을 때 적절한 대응 시스템이 마련된, 국가의 책임을 다하는 곳일까요. KBS는 올해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려 합니다. 가야만 하는 군대가 갈 만한 군대의 모습인가, 하는 문제 제기입니다.

어제 '군은 안전한가'라는 질문에 이어 오늘은 군에서 안전사고를 당한 사람을 군은 어떻게 보살피고 있는지, 그 시스템에 보완할 점은 없는지를 살펴봅니다.

■바다가 무서운 '바다 소년'

현승(가명) 씨는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집 앞에서 몇 걸음만 가면 바다. 어려서부터 수영이 놀이였고, 능숙한 수영 실력으로 인명구조요원 자격증도 땄습니다. 동력수상레저기구(소형 선박) 조종 면허도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주도에서 인명구조사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인명구조사(라이프가드)로 일할 때의 현승 씨


바다에서라면 무엇을 해도 잘할 자신이 있어 해양경찰이 되는 게 꿈이었던 현승 씨, 해군을 선택해 입대했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폭발 현장

현승 씨가 고속정에 타고 훈련을 나간 지난해 3월, 갑자기 굉음과 비명이 들렸습니다. 수류탄이 선상에서 폭발한 것이었습니다. 현승 씨는 중상자 2명을 포함해 7명이 다친 사고 현장을 눈앞에서 봤습니다. 기사에 다 표현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사고가 난 것과 동종의 해군 고속정


"그 장면을 보자마자 아무 생각도 안 났고 머리가 하얘지고. ###님이 빨리 손잡아 드리고 말 계속 걸라고 쇼크 일어날까 봐. ###님 하면서 제가 손잡아주던 게 아직도 느껴지고. 진짜 아수라장이었죠. 그게 사람이 다칠 수 있는 건가? 욕 밖에 안 나왔어요. 손을 봤는데 손이 어딨지? 생각했는데 손이 없는 거예요. 그리고 ##을 봐야 하는데 ##이 없었거든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심각하고."

■두 번이나 옮긴 부대…극단적 생각도

사고 이틀 뒤 어찌 된 일인지 현승 씨는 생활관에 혼자 머문 순간이 있었습니다. 괴로운 기억이 엄습해 왔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극단적 행동까지 생각하게 됐다고 토로했습니다.

사고 이후 부대를 두 번이나 옮겼습니다. 그곳에 가면 더 잘 치료받고 잘 관리해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옮겨질 때마다 자신의 상태가 간부들에게 인수인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기억합니다.

"책만 보고 있었어요. 출근해서 뭐 아무것도 못 하니까 책만. 책 읽으라고. (간부가 제 상태를) 하나도 몰랐습니다. 왜 왔냐고 그런 말만 했지. 제가 힘든 표현을 해야 했고, 제가 스스로 상담 신청도 병원도 가고 싶다고 해야 했고요. 저희 부서의 높은 분이 저한테 '왜 네 맘대로 행동하냐'고. 저한테 엄청 뭐라고 하셨거든요. 높으신 분이라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잘하겠다고 숙이면서 조용히 나왔거든요."

현승 씨의 일기엔 간부들이 자신을 부담스러워한다는 내용, 그래서 눈치를 보는 내용, 위축된 심경이 곳곳에 서술돼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피해를 주고 있나 싶었다. 살기 싫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게 내 잘못인가 싶고 이렇게 살아가고 싶지 않다."
"조금이라도 날 신경을 써줬더라면 적어도 이렇게까지 죽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 하루도 약에 취해 어지러운 채로 잠이 든다. 수고했다고 해주고 싶다"
-현승 씨 일기 中-

사고 직후부터 쓴 일기.


■여전히 떠나지 않는 고통의 기억

사고 넉 달 뒤, 현승 씨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의병제대를 했습니다. 여전히 그날의 기억이 잊히지 않아 병원에 다니며 치료받고 있습니다. 수영이 취미이자 특기였지만 그 날 이후 바다를 보는 게 두렵고, 수영장도 가지 못합니다.

"하루에 네 시간, 이틀에 네 시간 정도 자고요. 잠깐 머리 말리는데 눈을 살짝 감잖아요.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려요. 그럼 진짜 다 던지고 바로 뛰어나오거든요. 맨날 불안한 마음에 살아야 돼요."

제대 직전 군 병원에서 받은 소견서


지난해 8월 보훈대상자로 선정해달라고 낸 신청은 아직 심사가 진행 중입니다. 군에서 의병제대를 했지만, 보훈대상자 신청을 뭘 준비해서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떤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군에 있을 때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현승 씨는 말했습니다.

■훈련하다 트레일러에 밟히다.

1995년 육군 포병으로 근무하던 김○○ 씨, 사고는 훈련 중 물이 담긴 트레일러를 6명이 옮기다 일어났습니다. 순간적으로 트레일러가 이동하며 왼쪽 발등을 밟고 지나가면서 발가락 복합 골절을 입었습니다.

훈련 중 사고로 잘린 발가락


결국, 왼발의 발가락 두 개를 한 마디 반씩 절단했고 복무를 이어갈 수 없어 의병제대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 사우나나 목욕탕도 못 가고, 빠르게 움직이는 운동도 어렵습니다. 발에 고르게 힘이 안 들어가 몸의 균형이 어긋나니 무릎과 허리까지 영향이 왔습니다. 절단한 발가락 주변 발가락도 아프고, 왼쪽 다리에 힘이 없는 증상으로 제대 후 재활치료를 받았습니다. 치료비는 본인의 몫이었습니다.

■뒤늦게 유공자 신청…"인정 불가"

유공자 신청을 알아보기로 한 건 그로부터 15년 뒤였습니다. 군에서는 안내를 받지 못했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유공자 신청을 해볼 만하다는 걸 지인한테 들었기 때문입니다.

군에서 치료받을 당시의 김 씨


하지만 결과는 유공자 인정 불가, 상이 등급을 받을 정도도 아니고, 객관적인 자료로 입증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입증을 하려고 자료를 모으려니 일부 자료는 보안이라는 이유로 공개를 거부해 확보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보훈 심사, '피해자 배려'는?

우리나라는 군에서 복무 중 다쳤을 때 유공자가 되기 위해서는 입증 책임을 본인이 지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김 씨 사례처럼 나중에 유공자 신청 대상이 될 수 있는지 모르니 그때그때 적극적으로 요구해 치료를 받으면서 본인이 말한 내용을 기록해 달라고 요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상관의 눈치를 봐야 하는 군대 내 분위기도 있습니다. 수류탄 사고를 목격한 현승씨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자 오히려 꾸지람을 들었다고 했고, 발가락이 잘린 김 씨 또한 나중에 "저 때문에 점수가 안 나왔다, 중대장, 포대장, 인사고과에 영향받은 것에 대한 화만 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라고 기억했습니다.

복무 중 사고로 인한 상이 등급이나 유공자 신청 관련 소송을 많이 다루는 김영환 변호사는 "본인이 말을 안 하는데 군 간부 입장에서 굳이 이야기를 꺼내 사고를 공식화, 명확하게 해 놓고 싶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고 당시 기록이 빈약해 당시 함께 복무했던 동료들을 찾아 사실 확인서나 증언을 부탁하는 번거로운 일도 생긴다고 합니다.

반면 최근까지 징병제였던 타이완의 경우, 공무 중 사고가 나면 자료가 자동으로 보훈 담당 부처로 넘어가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한국보훈학회 회장을 지냈던 한성대학교 국방과학대학원 선종률 교수는 타이완은 "치료가 되는 동시에 바로 상이 등급 부여하는 데 활용이 되는 체계라면서, 본인이 입증하려고 새로운 자료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자료 취합이 이뤄져 훨씬 선진화되고 간편한 시스템"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보훈 심사 결과가 나오는 시간도 크게 단축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의 보훈심사는 6단계인데, 이중 앞의 3단계는 본인이 보훈처에 신청하고, 보훈처가 다시 군·경에 요건이 되는지 의뢰하고, 이곳에서 다시 보훈처로 통보합니다. 이후에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심사가 이뤄집니다. 선 교수는 사고와 동시와 심사 부처로 바로 자료가 가게 되면 앞의 3단계를 상당 부분 간소화해 심사 기간과 행정력 낭비를 줄일 수 있다고 조언했습니다.


■ 상이 등급 기준은 '노동력 상실'만 따지면 될까?

상이 등급 기준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습니다. 군에서 다친다고 모두 보훈심사에 통과해 상이 등급을 부여받는 건 아닙니다. 큰 원칙은 '노동력 상실' 여부입니다. 손가락, 발가락이 일부 절단돼도 경제활동에 지장이 없다고 보면 등급을 받지 못합니다. 2개 발가락의 마디가 잘린 김 씨의 경우도 이에 해당했습니다.

예산은 한정돼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군에 가지 않았다면 다치지 않았을 것이고, 군을 떠난 후에도 생활에 지장을 받는 건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는가?"

이에 대해 선종률 교수는 "노동력 상실에 대한 보상은 기본이고, 그 외에 삶의 질이 제한을 받는, 정신적인 위축감과 같은 것도 국가에서 보상해줄 수 있는 쪽으로 상이 등급 제도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보훈처도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고 합니다. 군 복무와 관계성은 인정되나 노동력 손상에는 미치지 못하는 상이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예우를 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며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연관기사]① 바다만 보면 소름이 돋습니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19275
[연관기사]② 보상 받으려면 입증해라?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19276

지형철 기자 (ica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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