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50주년]1970년 '빨간 대외비' 찍힌 문건..대한민국을 바꿨다

김승준 기자 2021. 2. 16.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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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발전을 위한 '자체 인재 양성' 목표..산업화의 원동력
과학기술분야 인재 산파 역할..박사 1만3750명 배출
KAIST 정문 전경 /뉴스1

(서울=뉴스1) 김승준 기자 = 600명, 61명 그리고 1명.

1970년대 과학기술처가 파악한 한국 이공계의 석사, 박사, 대학원 전임 교원 수다. 이마저도 60개 대학에 분산돼 교육을 받고 있었고, 당시 이공계 대학원 정원은 1386명으로 정원의 절반도 안 되는 661명의 대학원생이 한국 대학원생의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석사과정 200명, 박사과정 200명, 전임교수 50명 규모의 대학원을 만들겠다는 다소 황당해 보이는 구상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듬해 1971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의 전신인 한국과학원(KAIS)가 설립됐다.

현실이 된 '황당한 구상'은 50여년이 흘러, 대학원 재학생 약 6700명, 한해 석·박사 과정 졸업생 1900여명 규모의 카이스트를 일궈냈다. 전쟁 후 폐허의 대한민국을 바꿔놓은 산업발전의 운동력이 된 과학기술 인재 양성의 산실은 이렇게 탄생했다.

한국과학기술대학원 구상 보고서 표지 (정근모 박사가 기증한 KAIST 기록·KAIST 기록포탈) 2021.02.09 /뉴스1

경제 발전을 위한 '자체 인재 양성' 목표로 시작

카이스트 설립은 1969년 미국 뉴욕공과대학교 부교수로 일하던 정근모 박사의 구상에서 비롯됐다. 정 박사는 미국 국무부에서 국제협력처 책임자로 임명된 존 해너 박사로부터 개발도상국 대상 원조 아이디어 제안을 요청받았다.

당시 과학기술처의 자료에 따르면 석·박사 교육 환경은 열악한 상황이었고, 대학원 진학자의 많은 수가 해외 유학길에 나섰다. 그리고 유학간 사람들의 귀국 비율은 10% 아래였다.

정 박사는 한국 내에 석·박사 양성을 위한 질 좋은 대학원이 필요하다는 아이디어와 사업 제안서를 미국 국무부과 주미 한국대사관에 제출했다.

이 제안은 한국의 '경제과학심의회의'에서 다뤄지게 된다. 이때 문교부는 기존 대학들의 반발을 우려, 반대 입장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논쟁 끝에 생긴지 몇 년 안된 신생 부처 '과학기술처' 산하로 결정됐다. 당시 과학기술처는 1967년 만들어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관리 등을 담당하고 있었다. 또 교육기관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학원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한국과학원(KAIS)으로 불리게 됐다.

이때부터 카이스트는 교육 당국이 관할하는 다른 대학과 달리 과학기술 부처가 관리하는 '대학 아닌 대학'의 지위를 가지게 됐다.

미국 국제개발처(US AID)의 교육 차관 제공 결정과 실사가 이어졌다. 이때 US AID는 설립 전반과 자문을 위해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부총장 프레드릭 터만을 단장으로 보냈다. 터만 단장은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공학교육의 대가다.

당시 터만 단장은 KIST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기업, 연구 기관, 정부 관계자들과 면담, KIST 소속연구원, 서울대 교수 인터뷰 등을 종합해 한국과학원 설립 의의와 가능성, 설립 자문 내용을 담은 터만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는 카이스트의 설립 목적을 '산업발전을 위해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 분야에 관한 심오한 이론과 실제적인 응용력을 갖춘 자를 양성하는 것'으로 밝혔다.

또 보고서에서는 2000년경의 카이스트를 Δ국제적인 명망을 가진 이공계 교육 기관으로 성장해 학계의 본보기가 되는 학교 Δ학문적 역량을 자체적으로 개발해 교육계에 새로운 기원을 이룩하는 첨병의 임무를 수행하는 학교 Δ정치와 경제 각 분야의 리더를 배출하는 학교 Δ한국인 생활 수준의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는 학교가 될 것이라 예견했다.

◇국가의 전폭적 지원…50년만에 이룬 성과

정부는 특별법을 제정하고, 최신 장비, 우수 교수진 유치 등의 노력을 지원했다. 그리고 학생들은 기숙사, 교육비 지원, 병역 특별조치(10주 이내 군사 교육 소집 대체) 이라는 혜택을 받았다. 또 경제 및 산업 발전을 위한다는 설립 취지에 맞게 산업체 출신의 산학제 학생 제도도 운영했다.

26명의 교수진, 106명의 신입생으로 과학기술원이 시작됐다. 카이스트 설립 전 661명의 대학원생, 1명의 전임 교수였던 한국 상황에서는 파격적인 규모의 교육기관이 만들어진 것이다.

설립 이후 현재까지 정부는 카이스트에 3조9000억원을 투자했다.

이같은 투자는 '인재 산실'의 결실로 이어졌다. 2020년 카이스트 리더십보드 간담회 자료에 따르면, 지난 50년간 카이스트는 1만3750명의 박사를 포함해 6만7000여명의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또 대기업 박사급 인력의 25%, 대덕연구단지의 박사급 인력의 25%, 국내 이공계 대학의 교수 중 약 20%가 카이스트 출신이다.

또한 누적 기준 1800여개의 카이스트 창업기업 중 1200여개가 생존, 연간 매출 총액은 약 13조6000억원이다.

세계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국제학술지 어드밴스드 머터리얼즈(Advanced Materials)는 지난해 9월 카이스트의 50주년을 조명하며 카이스트의 인공지능 센서·바이오·차세대 반도체 등 연구 혁신을 집중 소개하는 특집호를 발간하기도 했다.

카이스트 설립에 지원한 US AID 역시 자신들이 수행한 성과로 뽑고 있다. US AID의 성과를 분석한 미국과학공학의학한림원은 "KAIST는 대한민국이 어떻게 국제원조수혜국에서 과학기술 혁신의 리더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현재 카이스트는 또 다른 KAIST 설립을 돕고 있다. 케냐는 카이스트를 벤치마킹해 케냐 과학기술원(Keny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KAIST) 설립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으며, 카이스트가 설립 컨설팅을 맡고 있다.

seungjun241@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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