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객 폭력·코로나 위험 막을 '격벽'.. 버스는 의무, 택시는 하세월

박지원 2021. 2. 16. 06: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용구 사건으로 설치 필요성 재조명
머리 때리고 추행하고.. 기사 안전 무방비
비용·낮은 호응 탓 시범사업 단발성 그쳐
"2024년까지 전면 설치" 공언한 서울시
2020년까지 설치율 0.49%그쳐 공염불 우려
美·加선 격벽 설치 뒤 범죄 80~90% 줄어
"코로나 감염 예방 위해서도 지원 필요"
택시 기사들 설치 재개 요구 목소리 커
“취한 손님이 운행 중 몸을 툭툭 치거나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흔해요. 심지어 ‘돈을 줄 테니 같이 내려서 놀자’며 희롱하기까지 하죠.”

2년 경력의 여성 택시기사 이자순(62)씨에게 취객이 많은 저녁은 공포의 시간대였다. 만취한 이들이 길가에 나와 택시를 잡기 시작할 무렵이면 불안감이 엄습했다. 여성인 데다 고령인 이씨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성추행을 일삼는 취객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씨가 마음 놓고 운전을 할 수 있게 된 건 지난해 11월부터다. 광주시로부터 ’택시 보호 격벽 지원 시범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차량 내부에 보호 격벽을 부착한 것이다. 보호 격벽은 운전석 뒤 혹은 측면을 둘러싸 보호하는 투명 가림막으로, 얇은 아크릴판이지만 효과는 크다. 격벽 설치 후 3개월 동안 이씨의 신체를 건드리는 승객은 한 명도 없었다. 이씨는 “물리적 가림막이 생기니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하다. 실제 효과도 있다”며 “주변 기사들도 설치하고 싶어하지만 지자체 지원이 아직 많지 않아 아쉽다고들 한다”고 전했다.

최근 이용구 법무부 차관의 변호사 시절 ’택시기사 폭행 사건’이 논란이 되면서 유사한 사건들과 이를 방지하기 위한 택시 내 격벽 설치 문제가 재조명되고 있다. 취객들의 택시기사 폭행 사건은 경찰서에서는 ‘흔한 일’로 치부될 정도로 자주 발생하는 일이지만, 택시기사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설비인 보호 격벽 설치 지원은 미진한 것으로 확인됐다.

◆택시기사 폭행 막는 안전격벽… 설치는 요원

15일 경찰청에 따르면 주행 중인 운전자(택시·버스 등)를 폭행한 사례(특정범죄가중처벌법)는 2019년 2587건에 달한다. 주행 중인 운전자 폭행 사건에 일반 폭행 혐의가 아닌 특가법을 적용하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주행 중인 운전자를 폭행할 경우 핸들을 급하게 꺾어 2차·3차 사고가 발생할 위험도 높다. 대법원 역시 2015년 판결에서 “운전자 폭행은 교통질서와 시민의 안전 등 공공의 안전에 대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며 “형을 가중해 처벌하는 것이 맞다”고 판시했다.
특히 최근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택시기사와 승객 간 갈등이 더 늘었다. 택시기사가 승객에게 마스크 착용을 요구하다 시비가 붙는 일도 잦다. 지난 2일 경기 수원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해 달라고 요구한 택시기사를 폭행한 30대 부부가 경찰에 붙잡혔다. 지난달 31일 경북 포항에서도 마스크를 벗고 통화하던 승객이 마스크 착용을 부탁한 기사를 때렸다. 한 택시기사는 “주변 기사 중 마스크 착용 문제로 승객과 시비가 붙는 경우를 많이 봤다”며 “시비가 붙을까 봐 겁나 새 마스크를 늘 구비하고 다니다가 쓰시라고 무료로 드리곤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기사 폭행을 예방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보호 격벽이 꼽힌다. 미국과 캐나다의 경우 택시에 보호 격벽을 설치한 도시에서는 운전자에 대한 범죄가 80∼90% 줄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시내버스에 2005년부터 보호 격벽 설치가 의무화됐지만, 택시는 아직 관련 법안이 없다. 현재 포항·광주시 등 일부 지자체에서만 시범사업을 진행 중이다. 광주시 관계자는 “앞서 격벽을 설치한 기사들은 운전석을 발로 차거나 기사 머리 쪽으로 손을 뻗어 때리는 식의 폭행이 줄어들고 위협감도 덜 느낀다고 평가했다”고 설명했다.
광주광역시가 택시 100대를 대상으로 시범설치할 예정인 보호격벽. 광주시 제공
◆“예산 부족, 호응 낮다”며 외면하는 지자체

많은 지자체에서 한때 보호 격벽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서울과 경기, 강원 등에서 시범사업을 진행했지만, 대부분 단발성에 그쳤다. 시범사업이 중단된 요인은 비용 부담과 낮은 호응도다. 서울시는 2019년 “2024년까지 시내 모든 택시에 보호 격벽을 설치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2019년 250대 △2020년 2500대 △2021년 2만대 △2022년 2만7540대 등 세부적인 설치 계획까지 세웠으나 2019년 236대를 끝으로 멈췄다. 지난해에는 120대에 격벽을 설치했지만, 이는 ‘코로나19 입국자 전용 택시’를 위한 것으로 서울시가 당초 세웠던 계획과는 무관하다. 지난해 서울시 전체 택시가 7만1747대라는 점을 고려하면, 설치율은 0.49% 수준에 그친다. 서울시 관계자는 “예산 한계와 택시기사들의 낮은 호응도 등으로 사업이 중단됐다”며 “지난해 사업 수립에 앞서 격벽 수요를 파악했었지만 생각보다 수요가 많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택시기사들 사이에서는 격벽 지원사업을 재개해달라는 목소리가 높다. 전국택시운송사업자조합 관계자는 “2017∼2018년에 여러 지자체에서 시범사업을 추진했는데 돈을 주고받기 불편하다는 등의 이유로 기사들의 호응도가 낮았던 면도 있었다”며 “그러나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한 위협도 있어 보호 격벽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최진영 광주택시노조 의장도 “코로나19로 주취 폭행과 마스크 착용 시비가 결합해 택시기사들의 불안감이 높아졌다”며 “보호 격벽 설치가 확대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운전 중 폭행, 2차 사고 위험 커 엄벌해야”

“운행 중 폭행은 음주운전과 다를 바 없는 중범죄로 봐야 합니다.”

택시 내 안전격벽 설치 지원 법안을 발의한 국민의힘 김영식 의원은 15일 세계일보 인터뷰에서 “주행 중 택시기사 폭행 사건의 피해는 비단 기사 한 사람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면서 “2차·3차 교통사고로 이어져 대형 인명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며 택시기사 폭행을 엄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의원은 지난해 6월 코로나19 감염과 기사 폭행 예방을 위한 안전격벽 설치 지원을 골자로 하는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국회 관련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하고 좌초될 위기에 놓였다. 격벽 가격이 높게 산정되고 기사 호응도가 낮은 점 등을 이유로 논의가 벽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김영식 의원
지자체 지원사업 역시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일부 지자체가 코로나19 이전에 사업 호응도가 낮았다는 이유로 지원사업을 진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 김 의원은 “코로나19 감염 예방 필요성이 높아진 만큼 코로나19 이전 사업에서 호응도가 낮았던 것을 이유로 지원사업을 진행하지 않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해 법안소위를 앞두고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등 4개 택시 단체에 보호 격벽 관련 의견을 수렴한 결과 지원 방식에 대한 이견은 있었지만 격벽 설치 필요성에 대해서는 모두 공감했다”고 전했다. 이어 “택시 보호 격벽은 밀폐된 택시 안에서 발생하는 폭력이나 물리적 접촉을 일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에 시설적 측면에서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 의원은 택시기사 폭행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을 제대로 적용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가법에 따라 운행 중인 택시기사 폭행에 대한 처벌이 강화됐다고는 하지만 실제 사례를 보면 아직 적용 기준이 모호하고 판결 결과 역시 기존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택시기사 폭행 처벌에 관한 법은 이미 마련됐지만 결정적으로 이를 집행할 수사기관과 사법기관 등이 공정하게 바뀔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했다.

박지원 기자 g1@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