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융합] 흑인과 헤겔
‘흑인’은 왜 트럼프에 투표하는가
우리는 왜 ‘삼성’을 욕망하는가
헤겔의 변증법은 상호작용이 핵심
욕망의 특징은 일방성
변증이 발생하지 않아
당대는 변증의 긴장이 아니라
욕망이 지배하는 파국의 시대
의외의 사실. 트럼프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히스패닉과 흑인 유권자의 지지율은 4년 전 보다 더 높았다. 이는 2016년 백인의 지지율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백인 여성 50% 이상이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상대적인 수치이기도 하지만 왜 사회적 약자가 특권층에게 투표하는가라는 해묵은 질문을 다시 제기한다. 더구나 트럼프는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증후적 인물이었다. 노골적으로 여성과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와 불이익을 공언했다는 점에서, 새삼, ‘불쾌한’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지난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정. 법원 한쪽에서 두 팔을 높이 들고 기도하던 어떤 여성은 법정 구속이 선고되자, “대한민국은 망했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의 구속으로 대한민국도 삼성전자도 관련 주식도 끄떡없는데, 무엇이 망했다는 말일까. 한편 오규석 부산광역시 기장군 군수는 “서민경제·지역경제 회복을 위해 감히 용기를 내,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을 대통령께 간곡히 부탁드리는” 호소문을 발송했다. 지역 경제를 살리려는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해 한국은 공공부문 부채가 1100조원을 넘기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코로나로 인한 경기 침체에 대응한 정부 씀씀이가 커졌기 때문이다. 나라 전체 빚이 1000조원인데, 개인 재산이 10조원이 넘는 이가 있다.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 그가 재산의 절반인 5조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주가는 이틀 만에 7%가량 더 올랐다. 20~30대 젊은이들은 그에게 열광했다.
정보기술(IT) 산업은 자본주의 경제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20대 초반에 근로소득으로는 불가능한 절대적인 부를 축적한 이들이 등장했다. 아마 빌 게이츠가 첫 주자였을 것이다. 그들의 개인적 능력과 ‘나눔 마인드’와는 별개로, 첨단과학기술은 인류에게 크게 세 가지 현실을 초래했다. 첫째 고실업, 둘째 노동의욕 상실(특히 젊은층), 셋째 기후위기로 인한 팬데믹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원망하기보다는 욕망한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의료, 주택, 교육 모든 여건이 바닥을 치고, 20대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인데도 말이다.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욕망 상태에서 변증은 불가능
미국 사회에서 ‘황인종’을 “바나나”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피부는 노란색인데, 사고방식은 백인 지향적인 이들을 말한다. 미국에서만 그럴까. 한반도에 사는 남북한 사람들 모두 미국의 주류를 ‘목이 빠지게’ 바라본다. 외교·안보라는 ‘실리적’ 차원을 넘어 문화, 심리, 지식의 지배라는 사실이 근본 문제다.
공식적인 주권 회복 즉 제국주의 지배가 끝난 이후에도 ―우리에겐 8·15― 문화적 경제적 지배가 지속되는 상황과 이에 대한 각성을 주장하는 탈식민주의(후기식민주의) 사상은 프란츠 파농(1925~1961)에서 시작되었다(그는 이 연재물 첫 회에 등장했다). 스물여섯에 쓴 그의 대표작,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그 파급과 응용에 있어서 융합을 상징한다. 구조적이든 개인적이든, 지배와 피지배의 인간관계는 문명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파농의 ‘검문’을 피하지 않고, 지난 세기를 말할 수 없다. 식민주의 심리학의 창시자인 그는 정신분석과 정치경제를 결합했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를 사유한 남성이었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이성애자 남성성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파농 이후 흑인인권운동과 탈식민주의 사상은 진전을 거듭했다. 프랑스령(領) 서인도제도의 작은 섬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나 프랑스와 알제리에서 활동한 그는 서른여섯에 백혈병으로 숨졌지만, 현대 사상 전반에 걸쳐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유는 없다는 얘기다.
이 책의 배경은 당대 글로벌 자본주의가 아니라 그가 생존했을 당시 미국의 흑인운동이었고, 이 책은 그가 알제리에서 흑인과 식민지인의 정신과 의사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했기 때문에 맥락은 조금 다르다. 하지만 고전답게 사고의 틀을 제시한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영화로 만든다면,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2005년 작 <히든>(Hidden)이 가장 적확하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파농이 그토록 강조했던, 피식민지인들이 얼마나 제국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는지를 보여준다. 식민주의 과녁을 열두 번 명중시킨 화살의 힘은 다시 프랑스인을 향할 정도다.
파농의 가장 큰 업적은 헤겔과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재해석, 전복시킨 데 있다. 헤겔 변증법의 핵심은 역동적 상호 관계로, 둘의 위치를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그래서 타인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고, 노예의 투쟁은 주인을 구원한다. 덕분에 1980년대 한국 사회는 잠시나마 “노동자가 투쟁으로 자본가를 해방시킨다”는 논리가 가능했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는, 정확히는 주인됨/노예됨이다. 즉 여기서 주인과 노예는 실제라기보다는 ‘나’(Ich, I)라는 자기의식을 구성하는 과정, 나아가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다. 두 사람이 마주하면, 누가 누구를 인정할 것인가를 두고 긴장이 발생한다. 각자는 상대방으로 인해 그 상황의 주인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 결과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굴복한다.
그러나 파농에 의하면, 인종 문제에서는 이 변증이 발생하지 않는다. 젠더도 마찬가지다. 흑인이 인간의 역사에 등장한 계기는 실제 노예로서이다. 갑자기 백인 주인이 갈등도 없이, ‘과정도 없이’ 흑인을 노예로 인정했을 뿐이다. 헤겔의 주인 개념에는 상호성이 있지만, 인종 문제에서 주인은 노예의 의식을 비웃는다. 주인이 노예에게 원하는 것은 승인이 아니라 노동뿐이다. 따라서 파농의 노예 개념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해방의 근간을 마련하는 헤겔식 노예와는 다르다.
파농이 통렬하게 지적한 하얀 가면을 쓴 흑인은 백인과 같은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그의 흑인 개념은 헤겔식 노예보다 훨씬 종속적이다. 상대방에 대한 동일시와 욕망 상태에서는 변증이 발생할 수 없다. 당연히 상호 해방의 가능성도 없다. 욕망의 특징은 절대성, 일방성, 그리고 주체적 종속이기 때문이다.
긴장이 사라진 파국의 시대
재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고 의존(‘지지’)하는 이들이 있다. 후자가 훨씬 많다. 흥미로운 점은 전자보다 후자가 현실 참여에 더 열정적이고, 더 절실하다는 것이다. 재벌에게 생계가 달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대 자본주의는 파농의 다른 고전 제목대로 우리를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로 만들었다().
나는 비슷한 경험을 두 번 했다. 서울 시내 모 시민단체의 도로명 주소를 대고 택시를 탔는데, 기사는 금세 알아보고 나를 혼내기(?) 시작했다. “왜 거길 가느냐”면서 재벌의 무노조 경영이나 산업재해를 비판하는 활동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의 사자후를 멈추게 하는 방법은 “거기 안 가는데요. 그 옆 건물에…”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그의 논리를 잊을 수 없다. “내가 손님(나)보다 세상을 잘 알아요. 그 ×××들(재벌) 나쁜 짓거리, 모르는 게 아냐. 하지만 그들이 커야 우리에게도 떡고물이 떨어져요. 이미 평등은 없는 거야. 떡고물이라도 있어야 서민들이 살지.”
떡고물이 있다면, 고용과 안전이어야 한다. 문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기업’들이 고용을 창출하는가? 그렇지 않다. 아니,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의 비리와 무법을 덮어주어야 한다는 주권자들의 주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정의와 공정심에서 대기업을 비판하지만, 먹고살 만한 사람들을 강남 좌파라고 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들은 서민의 입장에서는 재벌만큼이나 부자였고 그만큼의 규모는 아니지만 ‘소소하게’ 부패했다. 그런데 재벌을 비판한 공으로, 진보라는 명예와 함께 정권에 입성했다. 그 택시 기사는 세상을 알았다.
역사 발전을 가능케 하는 적대와 긴장이 사라진 시대와 기후위기가 겹쳤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자리는 사라지고 몸은 아프고 나이 든 사람들에게 코로나는 계속될 것이다. 이후 삶의 비참과 고난이 확실하다면, 선택은 많지 않다.
파국은 굉음을 내며 등장하지 않는다. 흐느끼는 소리라면 슬픔이 힘이 될 수도 있겠지만 ‘영끌’, ‘광클’, 부자와 동일시 넘는 과시로서의 플렉스는 파국보다도 더 비극적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정치적, 윤리적 긴장을 견딜 수 없다면? 선거가 작아 보이는 시절이다.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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