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교 벽에 '공사트럭 무서워요'..몸살 앓는 역세권 청년주택
지난 8일 지하철 7호선 수락산역에서 걸어서 약 5분 거리에 있는 노원구 상계동 노일초등학교 담장에 초등학생들이 그린 그림 수십 장이 붙었다. ‘트럭이 다녀 무서워요’ ‘공사 소리 때문에 선생님 목소리가 안 들려요’ 같은 글자가 삐뚤빼뚤 적혀 있었다. 그림 위쪽엔 ‘청년주택 결사반대’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학교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한 건물 부지에 23층짜리 443가구 규모 역세권 청년주택이 들어서는 걸 반대하는 내용이다. 작년 말부터 이 학교 학부모들은 “공사 차량이 다녀 등·하굣길이 위험할 뿐만 아니라 각종 소음과 먼지 등으로 아이들 피해가 크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원구 관계자는 “학부모들이 촛불집회를 열고 진정서도 1만장 가까이 내며 반대하고 있다”고 했다.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인근에 있는 서초구 서초초등학교 주변도 비슷한 상황이다. 초등학교에서 약 100m 떨어진 한 빌라 부지에 20층짜리 역세권 청년주택을 짓는 걸 주민들이 반대하고 있다. 지난 8일 이 일대에서 만난 한 주민은 “왕복 2차선 좁은 도로밖에 없는데, 고층 건물 공사를 하면 그 길로 통학하는 아이들의 안전 문제가 걱정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정부는 지난 4일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며 수락산역이나 강남역 같은 서울 역세권에 주택 7만8000가구를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하지만 이번 정부 발표 전에 이미 유사한 방식으로 추진하는 서울 역세권 개발사업이 있다. 2016년 박원순 전 시장이 시작한 역세권 청년주택 사업이다. 규제를 완화해 민간 사업자가 건물을 더 높이 지을 수 있게 해주는 등 편의를 주는 대신 청년을 위한 임대주택을 8년간 공급하는 내용이다. 2022년까지 청년주택 8만 가구를 공급하는 게 목표다. 그러나 사업 지역 곳곳에서 주민들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발표 이후 약 5년이 지났는데도 지난 1월 말 기준 공급량은 2만2000가구로 27.5% 수준에 그치고 있다. 주민 반대가 워낙 심해 속도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부가 추진하는 역세권 개발 사업도 비슷한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중랑구 묵동에서는 청년주택 쏠림 현상으로 갈등을 빚고 있다. 1㎞ 남짓 떨어진 7호선 먹골역과 6호선 태릉입구역 인근에 각각 청년주택 건물이 1채씩 공사 중인데, 두 역 사이의 한 나이트클럽 부지에 청년주택 한 채를 더 짓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8일 둘러본 이 일대에는 ‘청년주택 몰아짓기 반대한다!’ ‘문재인 대통령님 묵동에만 2개째입니다’ 등의 문구가 쓰인 피켓이 줄지어 있었다. 권미애(43) 묵동지역균형발전위원회 위원장은 “공공 편의시설은 턱없이 부족한데 입주 세대만 늘리는 것이 납득이 안 된다”고 했다.
동대문구에서는 역세권 주변 임대사업자들이 원룸 공급 과잉을 걱정하며 시위를 벌였다. 은평구에서는 아파트 옆에 고층 청년주택을 지으면서 북한산 조망이 침해됐다는 주민들 불만이 크다. 공사장 소음과 먼지 등을 탓하는 민원도 자치구에 잇따르고 있다.
빗발치는 민원에 구청장들까지 역세권 개발사업에 집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서울 시내 25개 구청장은 지난 1월 말 공동 성명을 내고 “역세권 범위를 역 반경 350m에서 250m 이내로 줄이고, 청년주택 높이도 주변 지역 건물의 2.5배를 넘지 않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역세권마다 ‘청년주택 총량제’를 도입해 쏠림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청년주택 사업을 축소하라는 것이다.
서울시는 지난 1월 말 기준 22개 구 51개 역세권에서 68곳에 달하는 청년주택 인허가를 내줬다. 하지만 아직 첫 삽도 뜨지 않은 곳이 20곳이 넘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부도 지난 4일 발표한 부동산 대책을 통해 역세권 개발 계획을 내놓았다. 서울 역세권을 둘러싼 갈등이 더 커질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 국토교통부와 서울시가 지난 5일 발표한 서울역 역세권인 용산구 동자동 일대 쪽방촌 개발은 토지·건물 소유자들이 ‘재산권 침해’라고 반발하고 있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인프라가 갖춰진 역세권에 주택을 공급하는 것은 좋지만 결국 주민 반발을 어떻게 잠재우고 합의하느냐가 관건”이라며 “주민들이 호응할 수 있는 혜택에 대해서 더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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