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한번도 경험 못 한 설

김태훈 논설위원 2021. 2. 16. 03:1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설 명절을 부모님 댁 아닌 내 집에서 보낸 건 결혼 25년 만에 처음이었다. 시골 부모님께 차례상 명목으로 돈을 부쳐 드렸다. 인터넷에는 기막힌 경험담이 나돌았다. ‘동생네 식구들과 외식하려고 식당에 전화했더니 5인 이상은 집합금지라며 예약을 각자 하란다. 시키는 대로 하고 식당에 가니 자리가 홀 이쪽 끝과 저쪽 끝이다. 밥 먹는 동안 대화는 휴대전화로 하고 조카들 세배도 전화로 받았다’는 것이다. 밥을 함께 먹었는지 아닌지도 애매했는데 조카들 세뱃돈은 카카오페이로 보냈다고 한다.

▶초유의 ‘비대면 설날’은 곳곳에서 낯선 풍경을 만들었다. 방역 기준을 지키기 위해 시간 차로 부모 댁을 찾는 교차 방문, 그도 여의치 않으면 자식 중 한 명만 가는 대표 방문을 했다. 각지에 흩어져 사는 가족이 고글을 쓰고 가상현실(VR) 공간에서 만나 세배하고 덕담 나누는 신기술도 등장했다. 이 집 저 집 모두 줌(ZOOM) 켜놓고 각자 밥상에 앉아 가족 모임을 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코로나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지난해 미국과 유럽에선 이혼이 급증했다. 코로나를 뜻하는 코비드(COVID)에 이혼을 뜻하는 디보스(divorce)를 합친 신조어 ‘코비디보스’가 유행했다. 우리는 반대로 이혼이 줄었다. 지난해 1월부터 11월까지 총 9만7300여 쌍이 이혼해 재작년 같은 기간보다 4300건 넘게 감소했다. 마이너스 4.3%로 2017년 이후 가장 낮았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이혼 재판이 열리지 않은 탓도 있지만 명절 차례를 지내지 않아 부부 싸움 줄어든 게 이유란 분석도 있다. 명절 차례로 인한 가족 내 갈등을 뜻밖에 코로나가 누그러뜨렸다.

▶명절 해외여행이 어려워지면서 국내여행·쇼핑 업계는 특수를 누렸다. 제주도엔 15만명이 몰려들었다. 귀성객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 관광객이었다. 서울의 대형 쇼핑센터와 전국 스키·골프장은 물론이고, 호캉스(호텔+바캉스)를 즐기는 사람들로 호텔까지 북적였다. 관광지 노점엔 코로나 사태 이후 처음으로 긴 줄이 늘어서기도 했다.

▶비대면으로 이성 만날 기회조차 빼앗겼던 청춘 남녀는 언택트 설날 덕분에 고향 부모님의 결혼 압박을 안 받게 됐다며 안도했다. 취준생들도 “어서 취업하라”는 독촉, “누구는 졸업하자마자 취직했다더라”는 비교를 당하지 않았다며 귀성 무산을 반겼다고 한다. 코로나 설이 병 주고 약도 준 셈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명절이 아니다. 백신이 원래의 명절을 되찾아주기를 소망한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