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조선 칼럼] ‘신내림 관료’를 위한 변명
그는 ‘엘리트 공무원’으로 불렸다. 명문대 인기 학과를 나와 대학원 두 군데서 석사 학위 두 개를 받고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나랏돈으로 유럽 유학도 다녀왔다. 가까운 지인은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범생”이라고 했다. 동료들 사이에선 “일 잘하는 에이스”로 통했다. 그의 평판을 가감 없이 옮기면 “진지하고 똑똑하다” “선생님 스타일이다” “순수하고 착하다” 이런 말들이다. 열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만, 주변에서 손가락질받는 인물은 최소한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금 대전구치소에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서기관이었던 2년 전, 감사원 감사가 나오기 전날 야음을 틈타 사무실에 들어가 원전 관련 문건 444개를 삭제했다. 검찰 조사에서 “감사 정보를 알았느냐”는 질문에 “몰랐다. 신내림을 받은 것 같았다”고 진술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망연자실했다. 한 동료는 “나처럼 일 안 하는 사람은 멀쩡한데, 일 열심히 한 그 친구가 잡혀갔다”고 했다. 삼삼오오 모여선 “앞으로 누가 몸 바쳐 일하겠냐”고 서로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탈(脫)원전은 이번 정권 핵심 국정 과제다. 정권 초 국정 과제는 부처 내에선 선망의 업무다. “일 잘한다”는 직원들이 뽑혀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범생 공무원”이 어떤 자세로 주어진 ‘국정 과제’에 임했을지는 넉넉히 그려지고도 남는다.
그가 무슨 이유에서 ‘월담’을 했고, 왜 ‘신내림’으로밖에는 해명할 수 없었는지, 의문이 꼬리를 문다. 정권 실세들이 노골적으로 진실 규명에 적개심을 드러낼수록 궁금증은 더 커진다. 직속 상관인 장관은 구속을 면했고 갈 길은 더디어 보인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일이 드러났는데, 이를 수면 위로 밀어 올린 비정상적인 이유가 영원히 암흑 속에 묻혀 있을 순 없는 법이다. 엘리트 공무원의 ‘기이한 행적’은 지금은 퍼즐 한 조각이지만, 앞으로 수많은 퍼즐과 맞춰져 진실의 큰 그림이 드러날 것이다.
진실의 그림이 크든 작든, 그 속에서 그가 끼워 넣은 퍼즐이 크든 작든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물론 그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 하지만 그를 잡아당긴 외부의 힘이 있었는지, 그 외부의 힘이 얼마나 컸는지에 따라 법의 심판이 달라질 수 있다. 그 외부 힘의 겉면은 달콤한 당의정(糖衣錠)으로 포장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내면에서 여러 갈래 고민이 전쟁을 벌였으리라고 본다.
“말단 공무원도 그런 일은 안 한다”는 인터넷 글이 많다. 그도 부끄러울 것이다. 하지만 온전히 그만의 잘못인가.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국민을 위해 헌신했을 아까운 공복(公僕) 한 명을 잃었다. ‘신내림’의 가장 큰 피해자는 그래서 국민이다. ‘신내림의 배후’를 끝까지 파헤쳐야 할 이유는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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