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채식, 연결의 기쁨
[경향신문]
설 연휴가 끝날 즈음 새로운 요리에 도전했다. 냉이전과 당근라페였다. 냉이전은 말 그대로 냉이를 썰어 부침가루를 입혀 부친 것이다. 평소라면 부침가루를 알맞은 농도로 물에 개는 것이 귀찮고 어려워 엄두도 안 냈을 메뉴였다. 당근라페는 당근을 채썰어 소금에 절인 뒤 물기를 제거하고 올리브유·레몬즙 등과 섞어 한두시간 숙성한 뒤 먹는 음식이다. 이 역시 평소라면 ‘당근 채썰기’란 첫 단계부터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의 식단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 시간이 늘어나면서 집 주변에서 찾아낸 입맛이 맞는 식당 두 곳에서 번갈아가며 음식을 사다 먹거나, 아주 간단한 레시피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을 반복해서 해먹었을 뿐이다. 저음의 콘트라베이스 독주곡처럼 단조롭고 다소 음울한 식단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파릇파릇한 냉이전에 주황빛이 선명한 당근라페라니. 화사한 색감의 새로운 미각을 자극하는 음식들에 활력이 돌았다. 오케스트라까진 못되어도 협주곡 정도는 될 법했다.
활력엔 이유가 있었다. 친애하는 동료인 최미랑 기자가 펴낸 채식에 관한 에세이 <섭식일기> 덕분이었다. ‘나메살따구(고기)’를 먹는 것에 불편함을 느껴왔던 그가 1년 전부터 본격 채식을 실천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그는 내가 비건 지향 생활을 시작하고 2년 남짓 만에 회사에서 만난 첫 ‘채식 친구’다. 그덕에 회사에서 그동안 근질근질했던 입을 봉인해제하고 마음껏 채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함께 식사를 할 때 메뉴 선정에 한치의 이견도 없었으며, 다른 동료들과 함께 채식 식당을 찾기도 했다.
그렇기에 <섭식일기>를 읽는 일은 더 각별했다. 그는 오랫동안 ‘육식의 윤리성’에 대해 고민해왔다. 닭을 ‘달구’라고 친근하게 부르면서도 맛있게 먹는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고, 밥상에 고기가 오르면 한끼 식사가 되어준 동물들에게 남몰래 감사 기도를 올렸다. 그는 비인간 동물도 똑같이 존중하고 사랑하려 노력하는 다정다감하고 공감력 높은 사람이었다. 고기를 먹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며 불편함을 외면해온 생활을 그만두고 자신과 다른 생명을 존중하는 방식의 생활을 선택한 이후, 그는 채식으로 열린 또다른 풍요로운 먹거리를 맹렬한 호기심으로 탐구한다. 그 에너지가 내게도 전해져 요리할 마음이 동했나보다.
나의 경우, 채식을 시작한 계기는 ‘인간의 잔인함’ 때문이었다. 동물들이 공장식 축산시설에서 겪는 일들도 끔찍했지만, 공장식 축산시설과 도살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잔인한 노동 환경 속에서 폭력으로 인해 인간성이 망가지는 모습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멜라니 조이의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에서 도살장 노동자가 살아있는 돼지의 코를 햄처럼 잘라버리고 그 자리에 소금을 문대서 돼지가 고통에 몸부림치다 멍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묘사한 장면을 읽다가 나도 같이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육식은, 공장식 축산은, 인간성까지 파괴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처음으로 식당에서 고기 반찬을 집어들지 않았다.
육식은 기후변화와 지구의 미래와도 연관된 문제다. 지구온난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 중 하나로 공장식 축산이 지목되고 있다. 밀집되고 비위생적인 공장식 축산 환경은 인수공통 감염병을 확산시키고 있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도 이젠 익숙한 것을 버리고 ‘다르게 먹을’ 필요가 있다.
책을 통해 타인과 관계맺는 기쁨을 이번에 새로 알았다. 책을 통해 내가 알던 사람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폭이 일순간 확장됐다. 예전엔 미처 몰랐던 독서의 기쁨이었다. 이 연결이 주는 기쁨은 단지 동료와 나 사이에서 끝나지 않는다. 다른 생명과 지구, 미래로 뻗어나갈 것이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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