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 앤 캐치] 미중의 레드 라인 싸움
편집자주
국제 현안과 외교안보 이슈를 조명합니다. 옮겨 적기 보다는 관점을 가지고 바라본 세계를 전합니다.
미국과 중국 갈등이 첨예함을 보여주는 대목이 레드 라인의 등장이다. 양제츠 공산당 외교담당 정치국원은 미국을 상대로 레드 라인을 넘지 말라고 경고했다. 중국 외교 책임자가 양국 관계 재설정을 위한 중요한 시점에 레드 라인을 설정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레드 라인은 억제를 위해, 상대의 오판을 막기 위해 설정하는 금지선이다. 넘어서면 선택의 여지 없이 응징해야 하고, 그렇지 않는다 해도 정치적 부담이 크기 때문에 각국은 레드 라인 설정을 되도록 피한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잘못된 레드 라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준 경우다. 2013년 8월 오바마는 시리아 정부의 화학무기 사용으로 곤혹스런 상황에 처했다. 1년 전 대량살상무기를 시민에게 사용하면 레드 라인을 넘는 것이란 경고가 실현됐기 때문이다. 미국과 적대하는 북한 이란이 사태를 주시한다는 점에서 무력조치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무력을 쓰면 중동분쟁 확산이 우려되고, 하지 않으면 무력한 미국을 전세계에 발신하는 모순적 상황이었다.
사실 오바마의 레드 라인은 이전 미국이 설정한 레드 라인과는 달랐다. 핵심 국가이익이 아닌 단지 화학무기 사용 금지에 대한 국제규범을 회복하는 차원이었다. 이를 지키기 위한 무력 충돌은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오바마는 결국 응징이 아닌 평화를 선택했으나 두고두고 반대 진영의 비난거리가 됐다.
5년 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이 반군에 사린 가스 공격을 하자 보란 듯이 크루즈 미사일 59발로 시리아공항을 타격했다. 오바마의 레드 라인을 트럼프가 지켜낸 아이러니였다. 이후 트럼프는 레드 라인 문제에 봉착할 때면 오바마의 실수를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러시아가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권 수호를 위해 군사고문단과 군대를 보낼 때도 맞대응이 필요했으나 레드 라인을 긋지 않았다. 존 볼튼 국가안보보좌관은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다’는 말만 반복했을 뿐이다.
양제츠의 이번 레드 라인 발언은 지난 2일 미중 관계 전미위원회 화상회의에서 강경 발언을 쏟아내는 과정에서 나왔다. 취지는 구시대적인 미중 제로섬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관계로 돌아가 협력하자는 것이긴 했다. 미국의 중국 유학생 차별, 언론과 기업 제재, 공자학원 폐쇄를 비판한 양제츠는 홍콩, 티베트 그리고 신장 문제는 내정이며 넘어서는 안되는 레드 라인이라고 규정했다. 레드 라인을 넘게 되면 미중 관계, 미국 자신의 이익이 약화될 것이란 경고까지 붙인 걸 보면 작심한 발언이다.
사흘 뒤 양제츠와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의 첫 전화통화는 예상대로 가시 돋친 대화로 진행됐다. 블링컨은 신장과 티베트, 홍콩의 인권과 민주적 가치를 위해 맞설 것이라고 했고, 양제츠는 서로의 핵심 이익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내정 간섭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했다. 미중 당국자가 같은 문제에 금지선을 그어놓고 넘겠다, 넘지 말라고 경고하는 걸 일상의 장면으로 보기는 어렵다. 통화 이후 미중의 발표문은 마치 서로 다른 대화를 설명한 것 같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런 분위기에서 설을 앞두고 11일 이뤄진 미중 정상 간 첫 통화는 '냉담 대화'였다. 바이든 취임 이후 워싱턴과 베이징의 보름 간 침묵의 결말치고는 의외였다. 임기 초 정치적 밀월을 위한 덕담이 오갈만 했지만 두 정상은 서로 핵심 이익을 확인하는 설전을 벌였다. 통화 이후 바이든이 “나는 미국 국민에게 이익이 될 때 중국과 협력할 것이다”라고 밝힌 점에서 보면 그의 대중국 접근은 ‘아메리카 퍼스트 2.0’에 근접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미국 우선주의 속편이란 얘기다. 미중은 다시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는 모습이다. 트럼프 정부 때보다 불확실성은 줄었다지만 어두운 망령들이 다시 깨어날 것이라는 카산드라의 목소리들도 커졌다.
이태규 논설위원 tg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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