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진우 라이브] 한홍구 역사학자 "이 놈들아! 너희한테 이런 이야기 하는 놈도 내가 마지막이다" 호통 치시던 백기완 선생..우리 각자 자기 시대의 백기완을 만들어내야 할 숙제 남아

KBS 2021. 2. 15.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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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라디오에 있습니다.
전문 게재나 인터뷰 인용 보도 시,
아래와 같이 채널명과 정확한 프로그램명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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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화 운동의 한 시대가 저무는 느낌
- 늘 현장에 계셨던 분, 늘 청년이었던 사람
- “혁명가가 되든 깡패가 되든 네 힘으로 깨우쳐라” 부친 가르침으로 백범 김구 선생이 공부 시켜주겠다는 제안도 거절
- ‘민중들이 다같이 잘 사는 세상...해방이란 그런 것이다’라는 깨달음
- 민주화 인사 중 가장 심한 고문을 당하신 분일 것...‘조선의 범’이라 불리던 백기완 선생, 이후로 몸이 완전히 상해
- 87년 양김 단일화 실패 후 “79년의 고문만큼 87년의 패배 상처 컸다” 소회
- ‘동아리, 모꼬지, 달동네’ 처음 쓰신 분...백기완의 회고록 벽초 홍명희 <임꺽정>만큼이나 우리말의 보고
-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 소식에 “우리가 맨날 저놈들한테 쥐어터지고 당하기만 했는데 저들이 나쁜 짓 한 것 잘 정리하라” 칭찬
- ‘자기의 울타리를 만들지 마라, 기득권의 울타리를 끊임없이 깨쳐라’...백기완 선생이 평생 청년으로 사는 원동력

■ 프로그램명 : KBS1라디오 <주진우 라이브>
■ 코너명 : <훅 인터뷰>
■ 방송시간 : 2월 15일 (월) 17:25~17:40 KBS1R FM 97.3 MHz
■ 출연자 :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주진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백기완 선생이 1979년 보안사에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에 차디찬 독방에서 스스로 주문처럼 되뇌던 말이 시 '묏비나리'로 태어났습니다. 그 시는 다시 '임을 위한 행진곡'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민중의 벗, 통일운동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투병 끝에 별세했습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산증인이었습니다. 그가 걸어왔던 길 그리고 그를 기억해야 하는 우리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안녕하세요.

◆한홍구: 안녕하십니까?

◇주진우: 교수님 어디세요?

◆한홍구: 저 연구실입니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요.

◇주진우: 백기완 선생님의 별세 소식 어떻게 들으셨어요?

◆한홍구: 많이 편찮으셔서 그런 얘기만 전해 듣고 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소식을 들으니까 진짜 이 시대의 어른이 이제 정말 안 계시는데 선생님 같은 분이 가셨고 그냥 단지 큰 어른 한 분이 별세하신 게 아니라 뭐랄까. 민주화 운동의 한 시대가 이제 진짜 저무는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주진우: 통일운동가였고 민주화 운동가였고 시인이었고 작가였고 그리고 또 한글학자였고요. 정치인이었습니다. 교수님, 백기완 선생님 어떤 분이셨습니까?

◆한홍구: 뭐 저 개인적으로는 제가 역사에 눈을 뜨게 한 그런 이제 뭐라고 할까요. 대표님을 직접 뵌 건 아니지만 백범사상연구소장을 하시면서 앎과 함이라는 조그마한 문고를 내셨어요, 그때 돈을 50원짜리. 제가 이제 중학생 시절에 그걸 통해서 신채호 선생을 만나게 되고 장준하 선생을 만나게 되고 미국 노동운동사도 읽게 되고 이제 그런 추억이 있고요.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뭐 지금 주 기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통일운동가이자 민주화 운동가이자 시인이자 민중 정치인이셨는데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 얘기한다면 늘 현장에 계셨던 분이고.

◇주진우: 그렇죠.

◆한홍구: 그런데 하여간 우리 나이로 거의 아흔이 돼서 돌아가셨지만 늘 청년, 누구보다도 젊게 사셨다고 생각이 듭니다.

◇주진우: 그렇습니다. 항상 광장에 계셨고요. 꼿꼿하게 서 있었습니다. 청년이었어요. 저도 항상 그 생각이 듭니다. 맨 앞에서 두루마기를 입고 항상 앉아 있던 선생님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한홍구: 아휴, 그런데 안타까운 건 뭐냐 하면 해가 갈수록 선생님이 여위어 가시니까 그 현장에 이제 맨 앞에 계시는데 선생이 나오시면 우리도 힘이 되고 좋기는 하지만 선생께서 이제 참 그... 아휴, 마음이 안 좋았죠.

◇주진우: 저기 백기완 선생님의 할아버지가 독립군한테 군 자금을 대어주다가 고문 끝에 옥사당하기도 했고 그리고 백범 선생도 이렇게 피신시켜주고 돌봐주고 그랬습니까?

◆한홍구: 네,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할아버지 되시는 분, 백태주 선생 그분이 민족대학 건립 운동도 하고 원래는 천석꾼 부자였는데 독립운동하다가 이제 다 그 자산을 탕진하고 고문당해서 피를 한 말 쏟고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우리 백기완 선생님도 고문을 많이 당하셨고요. 이제 할아버지의 그 인연으로 해서 백범 선생하고 또, 아주 어렸을 때 백범 선생의 눈에 들었는데 백범 선생께서 공부시켜주겠다 하셨는데 그 아버님 되시는 분도 또 별나신 분이었나봐요. 백기완 선생님은 공부시켜준다니까 좋아하셨는데 네 힘으로 깨우쳐나가야 네가 혁명가가 되든지 깡패가 되든지 뭐가 되든지 네 힘으로 해야지 하면서 그 도움을 못 받게 하셔서 백기완 선생님의 공식 학력이.

◇주진우: 초등학교

◆한홍구: 고향에서 월남하셨잖아요. 옛날 국민학교 4학년인가밖에 없죠. 그렇지만 뭐 어떤 지식인보다도 우리 문화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많은 후배들한테 자극을 주십사.

◇주진우: 백기완 선생님이 반독재투쟁 그리고 민주화운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한홍구: 그러니까 이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선생님 동문들, 친구들 10에 8명은 죽었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 살아남은 사람으로서의 어떤 그 책임감, 그런 것이 있었고 처음에는 농민운동, 문맹퇴치운동 좀. 나중에 선생님 스스로 표현하시기에 개념적인 운동을 많이 하셨는데 그 한일회담을 거치면서 거기에서 과거에 독립군으로 뭐 이런 날리고 싸웠던 유명한 장군들이 법정에 덜덜 떨면서 나서지도 못하고 하는 걸 보면서 그러니까 앞장을 서시게 되셨고 결국은 백범 선생의 가르침이기도 한데 이제 우리가 민중들이 다같이 잘 사는 세상, 해방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해방의 뜻을 아는 데 30년 걸렸다, 하는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그런 농민운동 또 민족운동을 하다가 그것이 민중으로 나아가는 그런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이 듭니다.

◇주진우: 백기완 선생님의 젊었을 때 사진을 보니까 덩치가 이렇게 크더라고요. 거구셨더라고요. 그런데 계속 말라가기 시작합니다.

◆한홍구: 제가 가슴아픈 게 원본 사진 1장 갖고 있는데요. 79년도에 박정희 죽고 난 다음에 YWCA 사건이라고 있었습니다.

◇주진우: 결혼, 위장결혼.

◆한홍구: 그게 이제 정권을 연장해나가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재야 민주화운동 쪽에서 계엄해제를 외치고 민주주의로 이행을 강력하게 촉구하는 그런 운동이었는데 그것을 이제 주로 하셨다가 이제 위장결혼식이었어요. 집회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진우: 집회를 금지시켜놔서 결혼식 하는 것처럼 집회를 한 거죠. 위장결혼식이요.

◆한홍구: 하객들이 모였는데 그 사건으로 잡혀가셔서 가장 심한 고문을 당하셨습니다. 아마 우리 이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고문으로 유명한 게 김근태 의장이 당하셨고 박종철 군이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실제 제일 심한 고문을 당한 것은 아마 백기완 선생님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주진우: 보안사.

◆한홍구: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셔서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셨고. 그래서 이제 조선의 범이라고 불리셨던 분인데 이제 그때 몸을 완전히 상하셨어요. 그래서 그 이후에 거기에서부터 일어나는 과정에 개인으로서나 또 우리 사회로서나 이제 굉장히 큰 어떤 이게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었고 광주를 이겨내고 그다음에 김근태 의장의 남영동에서의 고문 그리고 부천서에서의 고문 그런 걸 딛고 6월항쟁으로 나아가는 그런 큰 역할을 하신 거죠.

◇주진우: 대중의 관심에는 1987년 6월항쟁 그리고 87년 대선 출마로 민중 후보로 나왔었잖아요, 두루마기 입고. 장발을 이렇게 휘날리고. 결국 뭐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면서 사퇴하기는 했지만 정치가로 그러니까 대선 후보로 나왔었는데 그때 대선 출정은 역사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한홍구: 뭐 일부에서는 이제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시대 상황 속에서는 절박했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 이제 6월항쟁의 대의에서 볼 때 그러니까 그것이 민주화운동 진영이 단결하지를 못했어요. 그리고 이제 그것을 결국 단일화를 압박하는 그런 효과로서 민중 후보로서 그러니까 출마를 하셨는데 결국 우리가 또 깨달은 게 아직까지 민중의 힘이 양 김 씨를 능가할 만한 힘이 없었다는 점을 깨닫게 되셔서 개인적으로도 백기완 선생님도 그 87년의 패배가 79년의 고문 못지않은 상처가 되셨다 이제 그런 말씀들을 하셨고 그래서 이제 우리 사회에서 보수 정치 세력의 분열 또 그다음에 그들의 정권 욕심 이런 것들을 믿지 못하고 민중이 주체가 되는 그런 민중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꾀해야 한다 했는데 아직까지 그게 잘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어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주진우: 선생님은 소설과 수필집을 낸 문필가고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쓴 시도 만드셨어요. 제가 대학교 때 이렇게 데모하다가 선생님한테 가서 안녕히 계셨어요? 이렇게 물어보면 인사를 하면 ‘안녕’이 그게 한자말이니까 한글로 인사를 해야 한다고 저한테 ‘잘잘’ 이렇게 인사를 하라는 거예요, 다짜고짜. ‘잘잘’ 이건 좀 심한 것 같은데요, 선생님 그러면 이제 그래도 하다 보면 된.

◆한홍구: 선생님께서 만들어서 지금 이제 죽어 있던 말이 사라지고 나서 이제 많이 쓰는 말이.

◇주진우: 새내기.

◆한홍구: 가령 뭐 네, 새내기도 그렇고 동아리도 그렇고.

◇주진우: 동아리, 모꼬지.

◆한홍구: 네, 모꼬지도 그렇고 또 TV 드라마도 됐지만 달동네.

◇주진우: 네, 달동네 맞아요.

◆한홍구: 그 판잣집 같은 것도 그렇고. 선생님이 남기신 회고록 있잖아요. 그 회고록이 우리말의 보고죠. 우리말의 아마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못지않게 우리말의 보고인데 그게 잘 전수가 안 되고 있는 게 안타깝죠. 저도 모르는 말이 많습니다.

◇주진우: 아무튼 갈 때마다 그런 말을 쓰라고 그래서 제가 좀 많이 부끄럽다고 이야기했었습니다.

◆한홍구: 야단도 많이 맞고요.

◇주진우: 그러니까. 잘잘 그 말 안 쓰면 뭐라고 또 하시고 그러셨어요. 백기완 선생님 별세 소식에.

◆한홍구: 그런데 이제 참 가슴 아픈 게 뭐냐 하면 그렇게 야단치신 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뭐냐 하면 이놈들아, 이렇게 너희한테 이런 이야기하는 놈도 내가 마지막이야.

◇주진우: 맞아요.

◆한홍구: 그런 말씀을 늘 하셨는데 이제 선생님 참... 그러네요.

◇주진우: 네, 아무튼 저도 많이 쫓기고 싸울 때 더 많이 싸우라고 하고 더 열심히 하라고 막 하셨는데. 참 예뻐라 하셨는데.

◆한홍구: 저한테는 반헌법행위자열전 칭찬을 한다 했더니 잘한다고 우리가 맨날 저놈들한테 쥐어터지고 당하는 것만 했는데 저놈들 나쁜 짓 한 걸 제대로 잘 정리하라고 격려해주시고 그러셨어요.

◇주진우: 그러게요. 최충연 님께서 “독립운동하셨던 분들의 자손은 자손까지 고문 받고 가난과 고통을 받고 친일파들은 떵떵거리고 살다가 자손에 자손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기득권을 장악하고 떵떵거리니 참 가슴 아픕니다.” 이야기합니다.

◇주진우: 선생님, 백기완 선생님의 발자취 뭐라고 보십니까? 선생님의 어떤 정신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까?

◆한홍구: 선생께서 이제 늘 하시던 말씀 중에 당신께서 어렸을 때 깨우친 거라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없는 놈끼리 싸워봐야 코피만 터진다고. 싸움은 나쁜 놈하고 있는 놈하고 하는 거야.'라고 하셨고 우리 젊은이들한테는 끊임없이 깨우쳐라. 그리고 자기의 울타리를 만들지 말고 자기가 만들려는 울타리, 기득권의 울타리를 끊임없이 깨쳐달라고 하셨고 그런 게 이제 선생님의 청년으로 사는 원동력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주진우: 청년이었어요, 백기완 선생님은. 다음 세대도, 우리도 백기완 선생님의 그 청년 정신 본받아야 할 텐데요.

◆한홍구: 이제 뭐 주 기자나 저나 지금 젊은 사람들이 볼 때는 한참 기성세대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청년들한테는 어떤 모습이 될까와 그다음에 각각 자기 시대의 백기완 같은 분을 만들어내는 거. 백범 선생 시대에는 백범이 계셨고 민주화운동 시대에는 또 장준하 선생님, 백기완 선생님 같은 분이 계셨고 또 이제 우리 시대에는 과연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가 참 어른이 가시니까 그 빈 자리가 이제 더 크게 느껴집니다.

◇주진우: 통일문제연구소장으로 계셨는데 통일의 주역이 돼야 할 청년이 통일에 반감을 갖는 거에 대해서 마지막까지 좀 슬퍼하셨는데요. 안타까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였습니다.

◆한홍구: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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