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89년 땅불쑥한 삶..백기완, 통일 싸움꾼이자 이야기꾼

이재호 2021. 2. 15.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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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 별세]60~80년대 본격 반독재 운동
13·14대 대선때는 민중후보로
2천년대 들어서도 세월호·탄핵..
늘 민중운동 현장 맨 앞에 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혜화동 서울대학교 장례식장에서 15일 오후 시민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내 살아온 꼴은 한마디로 땅불쑥해. 땅이 평평하지 않고 툭툭 튀어나온 꼴이니, 특이하다 말이지. 그 큰 줄기를 뽑아보니 통일 싸움꾼이 하나요, 이야기꾼이 둘이야. 그래서 그 특이한 내력을 남겨볼라 그래!”

백기완 선생은 과거 <한겨레> ‘길을 찾아서’ 연재에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땅불쑥했던’ 89년의 삶은 부슬비가 내리던 15일 새벽 마침내 평탄해졌다. 계절이 갈지자 걸으며 봄으로 가는데, 그는 우리와 함께 계절을 건너지 못하고 영면에 들었다.

선생은 계유년(1933년) 1월24일 황해도 은율 구월산 밑자락에서 4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해방 뒤 1946년 어머니와 큰형, 누나를 북한에 두고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내려왔다. 해방 이후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선생 가족도 남북에 나뉘어 살게 됐고, 갈라진 집안을 잇겠다는 일념으로 통일운동을 시작했다. 일제시대 때 독립군에 군자금을 지원하다 일본 경찰에 들켜 고문받고 옥사한 조부 백태주 선생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고 한다. 탈옥해 조부의 집에 피신했던 백범 김구 선생의 가르침, 장준하 선생과 문익환 목사와의 인연도 그를 자연스레 통일운동으로 이끌었다.

유년 시절 그는 식민지 시절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만 다니고 혼자 공부했음에도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우고 시와 소설 등 문학작품을 줄줄 읽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해외유학장려회’ 첫 수혜자로 해외 유학을 권유받았지만 “조국을 두고 혼자 유학을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청년 시절인 1952년부터 10여년 동안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을 운영했고, 도시빈민운동, 나무심기운동, 농민운동에 몸담았다. 선생은 이 무렵 농민운동가로 처음 언론에 이름을 올렸다. <동아일보>는 1955년 7월19일치 신문 3면에서 “백기완 군외 31명의 학생들은 20일부터 하기방학을 이용하여 2주일간 강원도 일대의 벽촌 지방을 두루 순회하면서 문맹퇴치 등 각종 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순회반을 조직하였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1957년 평생 동지였던 김정숙 여사와 부부의 연을 맺은 선생은 1960년 4·19 혁명 운동에 뛰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반독재 민주화 투쟁, 통일운동을 시작했다. 1964년에는 한-일 협정에 반대하며 함석헌, 장준하 선생 등과 반일 투쟁에 나섰다가 투옥됐다. 1966년엔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하며 반독재 운동을 전개했다. 1974년에는 “유신 철폐”를 외치며 ‘유신헌법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를 받고 장준하 선생과 함께 구속됐다. 1979년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위장결혼 사건’(대통령 직선제 요구 시위)을 주도했다가 보안사에 끌려가 감금·고문당했다.

2015년, 쌍용차 해고자 복직과 정리해고 철폐를 위한 한겨울 오체투지 행진 중 참가자들이 경찰에 연행되자 눈물 흘리는 여든세 살 백기완. 이정용 촬영. 통일문제연구소 제공

선생은 이때 10시간의 모진 고문을 받던 중 정신을 잃고 깨어나 쓴 시가 ‘묏비나리’라고 밝힌 바 있다. 1980년 옥중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 소식을 들은 그는 옥고를 치르면서도 반독재·민주화 운동의 중요성을 호소했다. 황석영 작가는 묏비나리의 일부분을 따 5·18 광주 민주화 항쟁 희생자 추모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썼다.

선생은 1986년 ‘권인숙 부천 성고문 진상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도 체포돼 또 한번 옥고를 치렀고, 이듬해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열린 13대 대통령 선거에 학생·노동자·민중의 요구를 받아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다. 하지만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다.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도 민중후보로 추대됐으나 현실 정치의 벽은 높았다.

수차례 옥고를 치르며 모진 고문을 당해 병든 몸이었지만 선생은 노동자, 농민, 철거민 등 약자를 위한 집회 현장 맨 앞줄을 지켰다. 탁월한 문장가였던 그는 동시에 뛰어난 연설가였다. 새하얀 머리에 두루마기 자락 휘날리며 집회 현장 연단에 올라설 때마다 선생은 언제나 피를 토하듯 문장을 쏟아냈다. 백골단에 의해 목숨을 잃은 명지대생 강경대 추모 집회(1991년),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2003년), 용산참사 투쟁(2009년),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와 국정원 댓글 사건 규탄 시국회의(2014년), 백남기 농민 사망 투쟁(2015년), 박근혜 탄핵 촛불 집회(2016~2017년) 등 민중운동 현장 앞에는 늘 그가 있었다.

묏비나리에서 “딱 한 발 띠기(발을 떼다)에 목숨을 걸어라” 했던 선생은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났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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