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받은 약자들의 영원한 벗 백기완의 마지막 원고 "김진숙 힘내라"
[최용락 기자(ama@pressian.com)]
한국 진보운동의 거목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세상을 떴다. 정권의 불의에 저항하는 현장, 약자들이 싸우는 현장이라면 마다 않고 발길을 향하던 그를 이제는 볼 수 없다.
지난해 1월부터 폐렴으로 투병생활을 해온 백 소장이 15일 오전 서울대병원에서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투사, 사회운동가인 동시에 새내기, 동아리, 달동네 등 수많은 한글어를 만들어낸 우리말 운동가, 소설 <버선발 이야기>, 자서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등을 펴낸 문필가였던 백 소장의 삶을 정리했다.
백기완 소장의 어린 시절...분단된 가족, 어려운 형편
백 소장은 1933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해방 뒤 1946년, 백 소장은 아버지를 따라 둘째 형, 여동생과 함께 서울로 왔다. 어머니와 큰형, 누나는 은율에 남았다. 그 시절 백 소장의 꿈은 축구선수였다.
서울 삶은 녹록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형편 탓에 축구선수의 꿈을 이루기는커녕 초등학교 4학년을 마지막으로 학교에도 다니지 못했다. 대신 백 소장은 독학으로 시, 소설 등 문학작품을 읽었다. 영어사전을 모두 외워 천재소년으로 신문에 나기도 했다.
이 시절 백 소장의 선생은 책속에만 있지 않았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거리에서 겪은 일이 그의 선생이었다. 백 소장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에서 평소 따르던 가대기(창고나 부두에서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나르는 일을 하는 사람) 형이 동네 친구들과 주먹질을 하고 이겼다고 으스대던 자신에게 해준 말을 서울역에 시비를 세워 새기고 싶다고 적었다.
"싸움이란 말이다. 턱없이 뺏어대는 놈들 있잖아. 그 있는 놈들하고 해야 하는 거라고. 없는 놈들끼리 붙어봐야 서로 코만 터지는 거야. 알겠어."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난 일도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간 백범 선생의 집에서 선생은 "저렇게 쏘는 눈을 가진 애한테는 무언가를 물려줘야지"하며 백 소장이 들고 간 <백범일지>에 서산대사가 쓴 시를 적어줬다.
눈이 허옇게 내린
들판을 가드래도
발걸음을 흐트러뜨리지 말거라
왜냐 오늘 내가 가는 이 길은
뒤에 올 사람들의 길라잡이가 되느니라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남북이 분단되며 가족도 나뉘어 살게 됐다. 백 소장은 이때 부산제5육군병원에서 군 복무를 했다.
전쟁 통에 징용된 작은 형이 죽기도 했다. 죽기 얼마 전 작은 형은 백 소장에게 "너희 언니(형) 이 백기현이는 저 노녘(북쪽) 어머니를 겨냥해서는 단 한 방도 쏠 수가 없구나. 그래서 하늘에 대고만 빵빵 쏘는구나"라고 적은 편지를 보냈다. 전쟁이 끝난 뒤 백 소장은 형의 시체를 찾기 위해 강원도까지 갔지만 찾지 못했다.
이같은 가족사는 이후 백 소장이 통일운동에 매진하는 계기가 됐다. 어려웠던 가정 형편과 고된 어린 시절도 백 소장이 일생에 걸쳐 노동자, 농민, 빈민 등 약자를 위한 삶을 살게 한 밑거름이었을지 모른다.
민주화 운동을 하며 치른 두 번의 옥고
전쟁이 끝나고 1954년, 20대의 백 소장은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마음이 맞는 벗들과 함께 '자진농촌계몽대'를 결성했다. 나무를 심는 '자진녹화대'도 만들었다. 백 소장의 이같은 활동은 그 자신의 술회에 따르면, 1961년까지 이어졌다. 이때 만들어진 인연으로 1957년 평생의 동지였던 김정숙 여사와 결혼하기도 했다.
백 소장이 한창 사회운동에 매진하던 1960년,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이 일어났다. 백 소장은 이때도 거리에 나가 민주화를 외쳤지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에서 당시 자신의 행적에 대해 "그 굽이치는 물살에 한 방울 이슬로 깨지지도 못하고 기껏 소리나 지르며 따라다"녔다고 회상하며 부끄러워했다.
4·19혁명 이후 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다. 백 소장이 재야운동의 전면에 드러난 것은 박정희 정권의 군사독재에 맞서는 싸움을 하면서였다.
그 시초가 되는 싸움은 1965년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백 소장은 당시 을지로 흥사단 강당에서 함석헌, 변영태 등과 함께 "한일협정 깨부수자"고 외치다 검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어 1969년에도 '3선 개헌 반대 투쟁'을 했다.
1972년 대통령 직선제 폐지, 대통령 종신 집권 가능 등을 내용으로 하는 유신헌법이 통과됐다. 백 소장은 다시 한 번 박정희 정권에 맞섰다. 1973년 장준하 선생 등과 함게 '유신헌법 개천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조직했다.
이듬해인 1974년 박정희 정권은 헌법 비방 행위 금지 등을 담은 대통령 긴급조치 1호를 발동했다. 백 소장은 장준하 선생과 함께 체포돼 긴급조치 1호 위반자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고 다음해 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됐다.
1979년 박정희가 사망하자 전두환이 10·26 쿠데타를 일으켰다. 백 소장은 이 시기에도 민주화를 위한 싸움을 계속했다.
대표적인 사건은 '1979년 YMCA 위장 결혼식'이다. 가짜 결혼식으로 사람을 모은 뒤 민주화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한 일이었다. 계엄령 하에서 사람이 모이면 신고를 해야 하지만 결혼식은 따로 신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다.
백 소장은 이 일로 용산구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몽둥이로 두드려 맞고 무릎을 앞으로 꺾이고 손톱을 뽑히는 등 고문을 당했다. 두 번째 옥고도 치렀다. 이때 자신을 을러대기 위해 쓴 장편시 <묏비나리> 중 일부가 훗날 황석영 작가에 의해 개작돼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에 쓰였다.
백 소장의 두 번째 옥살이는 1981년 3·1절 특사로 마무리됐다. 석방 뒤에도 백 소장은 민주화 운동을 계속했다. 80년대 중반에는 문익환 목사가 의장으로 있던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의 부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광야에서 비바람을 맞는 사람에게 변함없이 버팀목이 되어 준 사람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고 13대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백 소장은 민중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다. 김대중, 김영상 두 호보의 단일화를 민중의 힘으로 압박한다는 목적에서였다. 백 소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직접 만나 설득에 나서기도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선거 이틀 전 두 후보의 단일화를 요구하며 사퇴했다.
이어 1992년 백 소장은 노동자민중후보로 추대돼 다시 한 번 대선에 출마해 끝까지 완주해 24만여 표(1%)를 받았다. 독자적인 진보정치 시대의 뿌리로 평할만한 행보였다.
이후 말년까지 백 소장은 정권의 불의에 맞서고 생존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곁을 지켰다.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 밀양송전탑 반대 투쟁,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투쟁, 세월호 집회는 물론 기륭전자, 용산참사, 쌍용차, 유성기업, 콜트콜텍, 파인텍, 한진중공업, 태안화력발전소 등 투쟁 사업장에서도 늘 그의 모습이 보였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 반대집회 때는 하루도 빠짐없이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뉴스타파>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불쌈꾼 백기완>에서 백 소장에 대해 "8, 90년대 많은 재야인사가 노동자들 곁을 떠났지만 백 선생님은 늘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 함께 해주신 분"이라며 "광야에서 온몸으로 비바람을 맞는 사람에게 작은 언덕이 돼주신, 존재 이상의 의미가 있는 분이셨다"고 말했다.
약자들의 변치 않는 버팀목이었던 백 소장은 지난해 1월 폐렴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병상에서도 그는 약자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백 소장의 가장 최근 행보는 지난해 12월 '연내 중대재해법 제정과 김진숙 복직을 촉구하는 사회원로 기자회견'에 이름을 올린 것이었다. 당일 백 소장은 몸이 불편한 탓에 하루 온종일을 들여 쓴 육필 원고를 보내왔다. 그의 원고에는 "김진숙 힘내라"는 여섯 글자가 담겨있었다.
백 소장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이다. 발인은 오는 19일이다. 장지는 마석 모란공원에 마련된다.
[최용락 기자(ama@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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