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한 회현동 골목길 구수한 밥 연기 다시 피어나네"

강영운 2021. 2. 15. 17:2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요리인류' 이욱정 대표 인터뷰
코로나로 폐업하는 골목식당
서울 문화유산이 사라지는 것
회현동 밥집 배달 사업 시작
사회 온정에 상권도 살아나
일본 '철도역 도시락' 모델로
마을 곳곳에 도시락 만들고파
이욱정 PD가 9일 서울 중구 `요리인류` 사무실에서 도시락을 통한 도시 재생 사업을 설명하고 있다. [이충우 기자]
이욱정 PD의 작품에선 밥 내음이 난다. 세계 방방곡곡 음식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기록했다. 먹거리를 향한 천착은 '누들로드' '요리인류' 등 명작 다큐멘터리로 이어졌다. 요리를 정갈하게 담은 그릇엔 인간이 자연을 이해한 방식, 억척같은 환경을 견디게 한 집단의 지혜가 녹아 있다고 이 PD는 믿고 있었다. 그런 그가 서울 중구 회현동 골목길에서 동네 식당의 배달 도우미를 자처하고 나섰다. 코로나19로 매출이 급락한 식당들의 음식을 도시락으로 만들어 배달해 주는 사업이다. 음식 전문 다큐멘터리 PD에서 요식업 사업가로 업종 변경일까. 지난 9일 만난 이 PD는 "요리를 통한 도시 재생 사업 차원에서 식당들을 돕고 있다"면서 "요리 콘텐츠 제작도 병행할 계획"이라며 웃었다. 2019년 11월부터 KBS 사내 벤처 '요리인류' 대표로 일하면서 서울시와 함께 '요리를 통한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가 돕고 있는 집은 회현동 골목길 12개 식당이다. 모두 직접 국을 끓이고, 찬을 만들고, 밥을 짓는 평범한 백반집. 팬데믹으로 폐업 위기에 몰린 업장이기도 하다. 이 PD는 "코로나19로 동네 밥집은 그야말로 '멸종' 위기에 처했다"면서 "골목식당이 사라진 도시는 엄청난 문화적 인프라스트럭처를 잃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이후 동네 밥집이 하나하나 없어지고 있잖아요. 단순히 식당이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서울의 문화유산이 사라지고 있는 거죠. 안타까운 마음에 동네 식당 매출을 올리는 법을 모색하다 배달화 작업을 돕게 됐습니다."

회현동 도시락은 성공적이었다. 식당 열두 곳 모두 코로나19 이전으로 매출이 회복됐다. 일부는 월 매출이 500만원이나 오르기도 했다고 한다. 정성이 가득한 집밥 도시락에 대한 호응이 많았다. 이 PD는 "사장님들이 더 맛있는 식사를 위해 자체적으로 메뉴 개발에 나서 더욱 고무적"이라며 "평생 김밥·떡볶이만 팔던 분식집 사장님은 장어덮밥을 개발해 히트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사회적 온정도 이어졌다. SK는 도시락을 하루 500개씩 구매해 노숙인에게 제공하기도 했고, 배달의민족은 회현동 도시락 배달을 지원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회현동 골목길에는 다시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동네 식당을 살리지 못한다면, 우린 결국 공장에서 찍어낸 개성 없는 음식만 먹어야 하는 날이 올 수도 있어요." 따뜻한 밥 연기 하나로 동네를 살릴 수 있다는 건 그의 오래된 신념이다. 다른 문화에 개방적인 부모님의 영향이었다. 그는 "만주에서 태어나 생활하신 아버님, 일본에서 자란 어머님은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요리와 그 속에 담긴 문화를 알려 주셨다"면서 "40년 전 집에서 그라탕을 해 주신 건 우리 집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웃었다. 서울대 인류학 석사 논문으로 경기 포천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숙식을 함께 하며 이슬람의 음식 금기에 대해 쓰기도 했다. "전 세계 모든 언어의 등수가 정해질 수 없듯이, 모든 음식에도 우월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그 안에 아름다운 인간의 무늬가 각각 새겨져 있을 뿐이죠."

코로나19로 시작한 도시락 프로젝트지만, 그는 팬데믹 이후를 내다보고 있었다. 서울 모든 동네, 나아가 전국 마을 밥집의 도시락을 만드는 작업이다. 그는 "이게 단순히 골목 상권 살리기는 아니다"고 말했다. "도시의 소프트웨어, 음식 문화의 기록, 일자리의 재생이 가능하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일본 전국 철도역에서 파는 '에키벤'을 모델로 삼았다. "에키벤을 먹으려고 순례자처럼 전국을 도는 일본 식도락가가 많습니다. 대한민국 마을 곳곳을 도는 도시락 순례자들을 보는 일은 얼마나 멋질까 생각합니다. 동네 재료로, 동네 요리법으로, 동네 이야기를 먹는 것이니까요." 요리 기록가 이욱정의 꿈이 아궁이에서 알알이 익기 시작했다.

[강영운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