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명예도 이름도..'임 행진곡' 장단맞춰 떠났네

채종원 2021. 2. 15.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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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재야'백기완 선생 별세
일평생 통일·노동운동 헌신
1987년, 1992년 대선 출마도
바르게 잘사는 '노나메기' 꿈꿔
시인이자 소설가, 명연설가
시 '묏비나리' 임 행진곡 모태

평생을 민주화, 통일·노동운동에 앞장서온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정치권·시민사회에서는 재야 운동가이자 시·소설을 쓴 예술가, 명연설가였던 그를 추모하는 글이 이어졌다.

백 소장은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에서 4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조부인 백태주 씨는 일제강점기 시대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대고, 3·1운동 당시 태극기 수천 장을 제작해 배포하는 등 민족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조부는 탈옥한 백범 김구 선생을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켰고 이때부터 김구 선생과의 인연이 이어졌다.

백 소장은 정규 교육으로 초등학교를 다닌 게 전부였지만 독학으로 문학·영어 등을 공부했다. 1950년대에는 '자진농촌계몽대' 등을 결성하고 농민·빈민 운동을 통해 민중의식을 전파하는 데 주력했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을 시작으로 민주화 운동 전면에 나섰다. 1974년 '유신 철폐를 위한 100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 1986년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투옥됐다.

특히 'YMCA 위장결혼 사건'으로 보안사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10시간가량 정신을 잃고 깨어나 감옥에서 누운 채 입으로 웅얼대며 쓴 시가 '묏비나리'다. 묏비나리는 '우리 강산을 위한 기원'이란 뜻으로, 이 시에 쓰인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등이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모태가 됐다.

민주화 이후 치러진 1987년 대통령선거에 그는 민중 후보로 출마했다. 두루마기 차림으로 청중 앞에 나섰던 그는 명연설가였다. 당시 대규모 유세 현장에 10만명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그는 김대중·김영삼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며 선거 이틀 전 사퇴했다. 1992년 대선에도 독자 후보로 출마했지만 1% 득표율에 그쳤다.

이후에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했다. 2003년 펴낸 책 '백기완의 통일이야기'를 통해 젊은 층이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노력했다.

이 책에서 그는 '통일 문제를 젊은이, 늙은이, 어린아이와 엄마 아빠가 함께 마주 앉아 거침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백 소장은 노동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그가 꿈꾼 세상은 '노나메기'다.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래서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착하고 어질고 깨끗하고 올바르게 잘사는 세상'을 말한다. 2000년 계간지 '노나메기'를 만들었고 이후 노나메기 운동을 제안했다. '이제 때는 왔다' '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 등 시집과 '장산곶매 이야기' 등 소설도 펴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그 치열했던 삶은 '임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애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 씨와 딸 백원담(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백미담·백현담, 아들 백일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이며 발인은 19일 오전 7시다.

[채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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