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언제부터 일본 편을 들기 시작한 건가요
'중국 부상'에 맞서 미-일 동맹 강화해 가던
오바마-아베의 2014~2016년이 결정적 전환점
‘동맹 복원’을 핵심 외교 과제로 내건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집권한 지 한 달이 못돼 한-일 관계 회복, 한-미-일 3각 협력 강화를 외치는 미국 내 목소리가 본격화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이런 움직임이 한국에겐 ‘공평한 중재’가 아닌 ‘일본 편들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이런 흐름은 언제 시작된 걸까.
정의용 신임 외교부 장관은 설날 당일인 12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취임 뒤 첫 통화를 했다. 한-미 간 의사소통을 가급적 서두르려는 한국 정부의 조급함을 읽을 수 있다. 외교부는 회담 사실을 알리는 보도자료에서 “양 장관은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양국 간 현안 논의를 위한 고위급 협의를 개최하기”로 했고, “한-미-일 협력이 지속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공감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 국무부가 내놓은 자료의 뉘앙스는 미묘하게 달랐다. 블링컨 장관이 “지속적인 미-한-일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표현을 사용해, 미국이 한국에 ‘일본과의 관계 회복을 서두르라’고 설득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기 때문이다.
블링컨 장관과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의 10일 전화통화를 전하는 자료를 보면, 이런 분위기를 좀 더 느낄 수 있다. 미 국무부는 두 장관이 “미-일-한 3각 협력과 쿼드(Quad)를 포함한 지역 협력을 환영했다”고 밝혔지만, 일본은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의 실현을 위해 일·미·호(오스트레일리아)·인(인도)의 연대를 착실히 강화해 나가는데 일치했다”는 점만 강조했을 뿐 한-미-일 3국 협력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이 무언가 ‘외교적 잘못’을 범한 한국에 관계 회복을 요구하고 있고, 일본은 자신들의 분노가 정당한 것인 양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분위기를 풍긴 것이다.
미국은 한동안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한-일 역사 갈등이 분출될 때마다 자신들이 중시하는 ‘인권의 관점’에 기초해 한국이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미 있는 개입을 해왔다. 2007년 7월30일 미 하원이 일본의 집요한 반대를 무릅쓰고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이나 2013년 12월26일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때 “실망했다”는 반응을 내놓은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미국의 이런 입장은 2014~2016년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기 위해 이뤄진 미-일 동맹 강화 과정을 거치며 극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 시기 아베 전 총리는 2014년 3월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과 군의 개입을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2015년 4월엔 미-일 동맹을 기존의 ‘지역 동맹’에서 ‘글로벌 동맹’으로 활동 범위와 위상을 확대하는 미-일 안보협력지침(가이드라인)을 개정했다. 아베 전 총리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6년엔 ‘히로시마’와 ‘진주만’을 교차 방문하며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역사적 앙금을 상당 부분 털어내는데 성공했다. 미-일 동맹이 이전과는 다른 특별한 동맹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에 따라 미국이 한-일 역사 갈등에 개입하는 방식도 달라지게 된다. 미국은 2015년 초부터 한-일 화해를 노골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해 2015년 12월28일 ‘위안부 합의’가 이뤄진 뒤에는 “환영한다”는 성명을 내놓았다. 바이든 대통령도 부통령이던 2017년 1월6일 아베 전 총리와 전화통화에서 “미국은 위안부 합의를 지지하며, 쌍방이 이를 착실히 이행하는 것을 강하게 기대한다”고 말했다. ‘12·28 합의’를 통해 한-일 갈등을 봉합했다고 본 미-일은 2016년 11월 한-미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를 체결하고, 2017년 초 주한 미군기지에 사드 배치를 마무리 짓는 등 한-미-일 3각 협력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미국의 입장은 2017년 1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동맹을 경시했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뒤 다소 바뀌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6월, 2019년 2월과 6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세 차례 정상회담에 나서는 파격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문재인 정부는 2018년 1월 위안부 합의를 무력화했고, 2019년 가을 일본과 갈등 국면에서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내린 뒤 이를 번복하는 소동을 빚었다. 미-일은 2018~2019년 중국 포위를 위한 공동 구상인 ‘인도-태평양 전략’(일본에선 구상이라 표현)을 구체화한 뒤, 미국·일본·오스트레일리아·인도가 참여하는 안보 협의체인 ‘쿼드’ 강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새로 들어선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 견제를 위해 유연하고 긴밀하게 기능하는 한-미-일 3국 협력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이를 드러내듯 미 국무부 대변인실은 11일 <미국의 소리>(VOA)에 “일본과 한국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은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일본과 한국 간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강조했고, 미 의회조사국(CRS)도 한-일 관계와 미-일 관계 관련 보고서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최대 외교 과제로 한-일 관계 회복을 꼽았다.
미국의 본격 개입은 3월로 예상되는 블링컨 국무장관의 아시아 순방으로 시작될 전망이다. 미 <시엔엔>(CNN)은 11일 복수의 국무부 관계자를 인용해 블링컨 장관이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아시아 동맹국들을 3월 중순~하순께 방문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 정부는 지난해 9월 스가 요시히데 총리의 취임을 계기로 ‘도쿄평화올림픽’ 구상을 일본에 전하며 관계 회복을 시도했다. 하지만 ‘한국이 양보안을 내놔야 한다’는 일본의 강경한 입장 탓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지금처럼 갑갑한 상황이 이어진다면, 2015년 12월(12·28합의)이나 2019년 11월(지소미아 종료 결정 번복)처럼 일본과 관계에서 다시 한번 ‘결정적 양보’를 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수 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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