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핍박 받은 '영남 양반'의 비애
“(이번 관료 인사에서) 영남 사람은 한 명 말고는 (수령 이상 자리에) 거론된 사람이 없다. 내가 변방 장수에 임명된 것은 바로 쫓겨나는 것이다. 세력 없는 사람이 예사롭게 겪는 일이고 이 또한 관직이니, 어찌 죽음보다는 낫지 않겠는가.”(1787년 6월 22일)
서울의 명문가인 경화세족이 사실상 관직을 독점하던 18세기 말, 조선 관가에서 영남 출신은 찬밥 신세였다. 더구나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인데다 문관이 아닌 무관이라면 주류 양반에게 차별당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조선 후기 무관 노상추(1746~1829)의 일기에선 이 같은 비주류의 설움이 절절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임금을 호위하는 무관으로서 충의와 투철한 자부심을 지니고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
한 사람이 18세부터 84세까지 67년 동안 매일 쓴 조선시대 최장(最長) 일기가 우리말로 완역됐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최근 12권 분량의 ‘국역 노상추일기’를 완간했다. 9권까지는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에서 원문과 번역문을 열람할 수 있다.
‘노상추일기’는 조선 후기 양반의 삶과 사회의 실상을 입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자료의 보고(寶庫)로 평가된다. 노상추는 비주류의 한계를 일찍 깨닫고 집안의 경제를 이끌기 위해 23세 때 무과로 진로를 변경했으나, ‘취준생’ 생활 12년을 겪고 난 35세 때에야 간신히 급제할 수 있었다. 그 뒤에도 4년 동안 관직을 얻지 못했고 말단 무관직을 전전한 뒤 47세가 돼서야 활쏘기 솜씨가 정조 임금의 눈에 들어 정3품 선전관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삭주부사와 궁궐 수비를 책임지는 금군장 등을 맡았다.
일기에는 관직을 얻기까지의 신산한 고생이 적혀 있다. 상속 재산 500냥을 몽땅 과거시험 비용으로 쓴 뒤 “앞으로 굶어 죽을 운수가 아니겠는가, 공명(功名)이란 것이 정말 우습다”(1782년 5월 7일)고 한탄하기도 한다.
당시의 사회상도 자세히 기록됐다. 1808년 5월 18일에는 전염병이 창궐한 상황을 기록하며 “개가 죽으면 도랑에 버려서 썩은 시체가 무수히 쌓였다” “마을 사람 7~8명이 개를 도살해 삶아 먹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모두 죽었다고 한다”고 했다.
양반 흡연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궐내 금연령이 있는데도 군졸에게만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고 각 청에 입직하는 관원들은 담배 피우기를 예사로 하고 있다”(1799년 6월 2일)는 것이다.
당시 양반 사회에서 경조사 참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려주는 기록도 있다. 노상추는 부친상 때 조문하지 않은 최충국이란 사람의 집을 일부러 들르지 않았는데, 앙심을 품은 최충국은 하인을 시켜 노상추의 홍패(과거합격증)를 탈취했다가 항의를 받고 돌려주는 일도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국역 노상추일기'의 10~12권 분량은 연말에 온라인 서비스를 확대해 공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국역 노상추일기’에서 발췌한 내용들이다.
【1770년 윤5월 10일 일기 번역문】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기동(耆洞) 하인이 와서 부고를 바쳤는데, 외종조 고모인 여홍호(呂弘㦿) 정랑(正郞)의 부인께서 어제 오시에 돌림병으로 돌아가셨다. 초상이 돌림병이 돌고 있는 시기에 났기 때문에 형수씨께서 초종(初終)에 맞추어 갈 수 없었다. 나도 우연히 목에 부스럼 병을 앓고 있어서 목을 돌리기 어렵기 때문에 의관을 갖추고 외가에 가서 조문할 수 없으니 슬프고 참담하다.
【1776년 3월 24일 일기 번역문】
늙은 여종 분진(分眞)이 올해 나이 78세인데 돌림병으로 결국 오늘 새벽에 죽었다. 슬프고 가련한 것은 그가 증조부 때부터 일을 하여서 3대에 걸쳐 대대로 섬겼는데 죽은 형에게 젖을 먹여가며 돌보아주어 마침내 성장하게 해서 또다시 정엽(珽燁) 세대에 이르게 했다. 상전집의 성쇠를 한 몸으로 다섯 세대에 걸쳐서 지켜보았으니 공이 적지 않다고 하겠다. 장수의 복이 이 여종의 처지로 보면 도리어 불행이 되는 것이 많았다. 죽은 형이 살아있었을 때 죽었다면 여종이지만 보답 받는 것이 반드시 컸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임진년의 큰 변고를 겪지 않고 죽었어도 영예로웠을 것이다. 그런데 작년 겨울에 이르러 그 막내 딸 이례(已禮)의 세모자가 일시에 홍역으로 죽었고, 올 2월에 그 아들 삼재(三才)도 돌림병을 앓다가 죽었고, 이번에 그녀가 이병으로 죽었기에 그 불행을 말로 거론할 필요도 없으니 불쌍하다.
【1780년 8월 2일 일기 번역문】
상좌원(上佐院)에서 일찍 출발하여 큰길에 나서니 어떤 사람이 목화밭에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뛰어나와 함부로 홍패(紅牌)를 빼앗아 달아났다. 그래서 이유를 물으니 기동(耆洞)의 부장(部將) 최충국(崔忠國)이 그의 아들 셋을 시켜 남자 종 하나를 데리고 요로(要路)에서 빼앗게 한 것이었다. 그는 내가 선생을 만나지 않고 가자 쫓아온 것이라고 하였다. 저 남자종이 먼저 달아나므로 할 수 없이 나는 화판(花板)과 창졸(唱卒)을 실은 말을 내버려두고 혼자 말을 타고 바로 최충국에게 달려갔다. 최충국은 일찍이 서로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부친상 중에 있을 때에 그가 편지로 위문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를 방문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헤아리지 않고 내가 새 급제자로서 마을을 지나가면서 자신을 무시해 방문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어 이렇게 망측한 행동을 한 것이다. 내가 이에 면전에서 꾸짖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부친상에 조문도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지위를 무시했다고 원망하니 크게 체모를 잃은 것 입니다. 주인이 처신하는 태도는 나이가 들었는데도 밝아지지를 않습니다.”고 하니, 최충국은 사과하고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또 말하기를, “홍패는 임금께서 내려주신 것이니 빼앗거나 주는 것을 그대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입니까?”하니, 그가 이에 자기 죄를 한없이 인정하고 홍패를 되돌려 주었다.
【1782년 5월 7일 일기 번역문】
당초에 가산을 받아 각자 살 때에 상속분으로 얻은 것이 논 1섬 9두락, 밭 90여 두락으로 가격으로 치면 500여 냥에 불과하였다. 10년 동안 과거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 모두 팔아버리고, 화림(華林)으로 옮긴 뒤에 산 것 역시 과거시험으로 진 빚 때문에 팔았으니 나의 500 여 냥은 모두 과거 보는 데 사용하였다. 그러니 앞으로 굶어 죽을 운수가 아니겠는가. 공명(功名)이란 것이 정말 우습다.
【1787년 6월 22일 일기 번역문】
이날 도목정사(都目政事)를 하였는데, 친히 납시지 않으셨다. 정달신(鄭達新) 척형 보(甫)는 이성(利城) 수령이 되었고, 그 밖의 영남 사람은 거론된 사람이 없다. 나는 갑산진관(甲山鎭管)의 진동 변장(鎭東 邊將)이 되었는데, 병비(兵批)에서도 달리 거론된 사람이 없다. 내가 변장에 임명된 것은 바로 쫓겨나는 것이다. 세력 없는 사람이 예사롭게 겪는 일이고 이 또한 관직이니, 어찌 죽음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진실로 분하고 통탄스럽지만, 병조에서 나를 쫓아낸 것은 형편상 그러한 것이다. 신하된 자가 충성을 다함에 어찌 관직의 우열이 있겠는가. 스스로 마음을 너그럽게 가질 뿐이다.
【1792년 11월 3일 일기 번역문】
미시(오후 1~3시)에 임금의 명이 특별히 내려왔다. 전교하시기를, “어제 관궁으로 시행한 중일시사(中日試射)의 시기(試記)에서 오위장 노상추의 이름을 보고서 예전에 병조 판서를 역임한 이에게 물으니 병마절도사 아무개의 손자라고 하였다. 그 조부의 사적(事蹟)은 비록 알고 있었지만 그 손자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그러므로 매번 찾아서 쓰려고 해도 하지 못했는데, 그의 이름이 오늘 시기에 들어 있었으니 그에게 운이 있다고 할 만하다. 어제 저녁에 그를 불러 물었더니, 그의 조부는 과연 수문장 시절에 품계를 뛰어넘어 관직에 발탁되어 부천(副薦)으로서 병마절도사가 된 사람이었다. 더구나 그 조부가 수문장에 제수된 때가 지난 임자년(1732) 동짓달이었는데, 그의 이름을 알게 된 때가 올해 임자년(1792) 동짓달이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하지만 그의 인품이나 범절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니 병조 판서로 하여금 그를 불러서 보게 한 후에 과연 당상 선전관을 감당할 수 있다면 선전관 가설(加設)로 의망하여 들이라.”고 분부하셨다. 저물녘에 다시 하교하시니, 밤에 구전으로 차출되었다. 3경(오후 11시~오전 1시)에 당상 선전관으로 의망하여 들이자 낙점해 주시니 감읍하였다. 이야말로 천지처럼 망극한 임금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이날 밤의 순찰은 초경(오후 7~9시)에 했으며, 군호는 ‘백설白雪’ 두 자로 내리셨다.
【1799년 2월 4일 일기 번역문】
갑산(甲山) 사람 김철몽(金哲夢)이 와서 알현하면서 함경도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1월 초에 함흥(咸興)을 지났는데 돌림병이 이미 그곳에 도달해서 홍원(洪原) 땅의 사망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 8도 사람이 모두 고통을 받고 있다. 황해도, 평안도, 경기에서는 병이 잦아들고 있지만,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함경도에서는 지금 한창 극성을 부리고 있다고 한다. 고향의 소식을 듣지 못하니 너무 답답하다.
【1808년 5월 18일 일기 번역문】
들으니 양서(兩西)에 개 돌림병이 크게 일어나서 마을에서 개 짓는 소리가 드물다고 한다. 지금 들으니 도성 내에도 그렇다고 하는데, 개가 죽으면 도랑에 버려서 썩은 시체가 무수히 쌓였다. 시장에서도 개고기를 팔지 않는데 사서 먹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화성(華城)을 지나 온 사람에게 들으니 마을 놈 7, 8명이 개를 도살하여 삶아 먹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모두 죽었다고 한다. 이것 역시 괴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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