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백운규 영장 기각 사유, 검찰과 기자단에 다르게 밝힌 법원
지난 9일 대전지법이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며 검찰에 보낸 기각 사유에 ‘혐의 입증이 부족하다’라는 취지의 표현이 쓰인 것으로 15일 전해졌다. ‘입증’은 본안 판단에서 유·무죄를 다툴 때 쓰는 용어다. 법조계에선 유·무죄 판단과는 성질이 다른 구속 심사 단계에서 혐의 ‘소명’이 아닌 ‘입증’ 부족을 내세운 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검찰엔 “입증 부족” 기자단엔 “소명 부족”
대전지검 형사5부(부장 이상현)는 지난 4일 백 전 장관이 산업부 공무원들에게 월성 1호기가 즉시 가동 중단되도록 지시한 혐의(직권남용)와 경제성 평가에 개입해 한국수력원자력 등의 업무를 방해한 혐의(업무방해)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대전지법은 8일 영장실질심사를 거쳐 9일 새벽 백 전 장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당시 법원이 기자단에 내놓은 “범죄 혐의에 대한 ‘소명' 부족”이라는 영장 기각 사유가 알려지며 여권 등에선 “정부 정책에 대한 과도한 정치 수사” “검찰권을 남용하고도 영장 단계에서 혐의 소명조차 못한 검찰” 등의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나 법원이 검찰과 기자단에 건넨 기각 사유는 달랐다고 한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9일 검찰엔 “소명 부족”이 아닌 “혐의 입증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취지의 기각 사유가 건네졌다.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입증은 유·무죄 판단에 쓰이는 용어인데 구속영장 발부 여부에 대해 유·무죄 차원의 판단을 내린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영장 단계에서 소명보다 높은 수준의 증거를 요하는 입증이라는 단어를 쓴 것도 어색하고, 기자단에는 이를 소명으로 바꿔서 냈다면 이것도 잘못”이라고 했다. 더욱이 백 전 장관에 대한 수사는 정책의 당부(當否)에 대한 수사라는 비판이 있었기 때문에, 법원이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는 의견도 나온다. 대전지검 수사팀도 이 기각 사유를 받아들고 분석하는 데에만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전지법 측은 이에 대해 “범죄 혐의에 대해 소명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취지는 같다”고 했다.
◇대법관 ‘별개 의견'을 기각 사유에 기재
대전지법은 영장 기각 사유에 ‘혐의 입증 부족’을 언급하기 위해 지난달 박상옥 대법관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블랙리스트 사건 판결 당시 내놓은 의견을 인용했다.
“형법 제123조에 규정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구성요건해당성을 충족하기 위하여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한 사실 및 그로 인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사실이 모두 증명되어야 한다. 그런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는 ‘직권’, ‘남용’, ‘의무’와 같이 광범위한 해석의 여지를 두고 있는 불확정개념을 구성요건으로 하고 있으므로 이를 해석·적용할 때에는 헌법 제13조에서 천명하고 있는 형사법의 대원칙인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엄격해석의 원칙 및 최소침해의 원칙이 준수되어야 한다. (박상옥 대법관의 별개 의견)
형법 제123조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구성요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한 사실 및 그로 인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사실이 모두 증명되어야 하는데, 위와 같은 불확정개념을 구성요건으로 하는 범죄를 해석'적용할 때는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엄격해석의 원칙 및 최소침해의 원칙이 준수되어야 함. (대전지법의 기각사유)
박 대법관은 지난달 직권남용 혐의를 받는 김 전 실장에 대해 이 같이 말하며, 직권남용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 무죄라는 취지의 의견을 냈다. 이를 두고 법원이 박 대법관의 의견을 내세워 백 전 장관에 대해 사실상 무죄라는 심증을 내비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당시 대법원의 다수 의견은 박 대법관 생각과 달랐다. 박 대법관의 의견은 별개 의견이었다. 대법원은 김 전 실장 등이 문화예술위원회 등 소속 직원들로 하여금 각종 정부 지원 사업에 배제하도록 한 혐의가 ‘직권 남용'에 해당한다고 봤다. 대법원은 “피고인들이 정부 지원금을 신청한 개인 또는 단체의 이념적 성향이나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문예위 등이 수행한 각종 사업에서 정부의 지원을 배제하도록 지시한 것은 헌법과 법률에 위배된다”고 밝혔다. 다만, 직권을 남용한 것과 별개의 구성 요건인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인지’는 다시 따져보라는 취지로 김 전 실장 사건을 파기환송한 것이다.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영장전담 판사가 다수 의견도 아닌 별개 의견을 통해 본안에서 할 법한 이야기로 영장을 기각한 것”이라며 “영장전담 판사의 업무 영역에 해당하지 않는 부분을 판단해선 안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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