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마지막 책에 담긴 '노나메기'란.."너도 나도 올바로 잘 사는 세상"
[경향신문]
“이것은 자그마치 여든 해가 넘도록 내 속에서 홀로 눈물 젖어온 것임을 털어놓고 싶다. 나는 이 버선발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니나(민중)를 알았다. 이어서 니나의 새롬(정서)와 갈마(역사), 그리고 그것을 이끈 싸움과 든메(사상)와 하제(희망)를 깨우치면서 내 잔뼈가 굵어왔음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15일 별세한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이 생전에 펴낸 마지막 책 <버선발 이야기>(2019)에 쓴 말이다. 백 선생은 2018년 4월 심장 관상동맥이 막혀 9시간이 넘는 큰 수술을 받았다. 대수술이 끝나고 죽음의 목전에서 살아 돌아온 백 선생이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원고지였다. 백 선생은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몰래몰래 목숨을 걸고 글을 써 매듭을 지은 것이 <버선발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렇게 어렵게 완성한 <버선발 이야기>를 2019년 3월에 펴내며 백 선생은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송경동 시인 등이 선생과 함께했다.
<버선발 이야기>는 백 선생이 일생 동안 붙들고 온 화두인 민중들의 삶과 사상을 이야기로 풀어낸 책이다. 백 소장의 삶과 철학, 민중예술과 사상의 실체를 ‘버선발(맨발)’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냈다. 주인공 버선발은 머슴인 어머니의 아들이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 검정 두루마기에 하얀 목도리를 두른 백 선생은 수척해보였지만 민중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큼은 일평생 ‘거리의 투사’로 살아온 그답게 커다란 목소리를 냈다.
백 선생은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민중의 생각, 민중의 삶, 민중의 예술, 민중의 꿈이 그대로 담긴 게 <버선발 이야기>에 나오는 노나메기 사상이다. 너도 일하고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 사는 노나메기 세상, <버선발 이야기>에는 ‘내 것은 거짓말’이라는 민중사상의 핵심이 담겨있다”고 말했다.
“버선발이 던진 ‘말뜸’(화두)은 내 거라는 건 거짓이라는 것이야. 내 거는 끊임없이 내 거를 요구해. 버선발 얘기는 오늘의 자본주의 반인류적 반생명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커다란 말뜸이 아니겠느냐. 썩어 문드러진 구조를 한바탕 뒤집어 엎자는 거야. 한바탕을 바로 오늘 우리가 하자는 거지.”
백 선생은 <장산곶매 이야기> 등 소설과 수필집을 낸 문필가이자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원작자이기도 하다. <항일민족론>(1971),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1979), <백기완의 통일이야기>(2003),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2009), <두 어른>(2017) 등 평론·수필집을 비롯한 다수의 저작을 남겼다.
백 선생은 평생을 반독재·민주화 투쟁에 헌신했고, 힘없는 농민, 노동자 곁에서 싸웠다. 심장수술 이후 건강이 나빠진 이후에도 언제든지 자신을 필요로 하는 노동자 곁을 찾았다. 이 책을 펴낸 2019년에도 태안화력발전소 야간작업 중 컨베이어벨트에 몸이 잘려 운명한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의 장례식장을 찾았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기력이 쇠한 상태였다. 그는 김씨의 영정 앞에서 울었다. 버선발이야말로 백 선생의 삶 자체다.
“<버선발 이야기>를 쓰면서 내가 죽더라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도 있구나 생각을 했어요.”
백 선생의 말처럼 백 선생은 세상을 떠났지만 한평생 민중 곁을 지키며 자신의 몸을 내놓고 싸우던 백 선생의 정신은 우리 곁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관련기사 : ‘버선발 이야기’ 출간 백기완 소장 “다 같이 잘살되 올바로 살자는 이야기”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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