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서울 혜화동 통일문제연구소에서 생각에 잠겨있다. 2012.11.09 / 경향신문 자료사진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89세. 서울대병원 등에 따르면 백 소장은 이날 오전 입원 중 영면했다. 그는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생활을 해왔다.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난 그는 1950년대부터 농민·빈민·통일·민주화운동에 매진하며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참여했다. 최근까지도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사회운동에 헌신했다. 그의 생전 모습을 사진으로 정리했다.
세종호텔 앞에서 열린 김상진 전 노조위원장 복직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백기완 소장이 시작 전 의자에 앉아 있다. 한복 차림을 한 백발의 투사는 노령이 된 최근까지도 전국의 투쟁 현장과 연단에 올라 목소리를 높였다. / 2019.06.13 우철훈 선임기자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용균씨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김씨 어머니 김미숙씨의 손을 잡고 위로하고 있다. 2019.01.24 / 우철훈 선임기자
‘박근혜 퇴진 4차 범국민행동’에 참여한 백기완 소장과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광장과 세종로 일대를 가득 메운 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고 있다. 그는 이명박 정권퇴진운동, 민중총궐기 등에 참여해 부상을 입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한 광화문 촛불집회에는 23차례 중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았다. 2016.11.19 / 정지윤기자
서울 종로구 사진전시장 ‘류가헌’에서 백기완 소장과 문정현 신부가 <두 어른>전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비정규노동자의 집‘꿀잠’ 건립추진위원회 주최로 열리는 <두 어른>전에는 백기완 소장의 붓글씨 등이 전시됐다. 백기완 선생은 ‘장산곶매 이야기’ 등 소설과 수필집을 낸 문필가이자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원작자이기도 하다. ‘항일민족론’(1971),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1979), ‘백기완의 통일이야기’(2003),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2009), ‘두 어른’(2017) 등 평론·수필집을 비롯한 다수의 저작이 남겨졌다. 2016.06.27 / 서성일 기자
유성기업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유성기업의 이정훈 지회장이 고공투쟁을 벌이고 있는 충북 옥천군 옥천읍 옥각리 한 광고탑 근처에 모여 집회를 열었을 당시의 백기완 소장. 그는 2011년 부산 한진중공업, 2013년 울산 현대자동차와 경남 밀양 송전탑 반대 현장, 2014년 충북 옥천 유성기업 등으로 가는 ‘희망버스’에 빠지지 않고 올라탔고 자본과 공권력을 꾸짖었다. 2014.03.15 / 경향신문 자료사진
팔순을 맞은 백기완 소장이 서울 세종홀에서 마련한 팔순잔치에서 공연을 보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2012.03.18 / 김영민 기자
쌍용차 범대위가 서울 대한문 앞 쌍용차 해고노동자 분향소의 중구청 관계자들에 의한 철거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에서 백기완 소장이 물을 마시고 있다. 2013.06.10 / 경향신문 자료사진
백기완 소장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해고 노동자 문제해결을 위한 문화예술인 선언에서 노동자 해고를 방관하는 이명박 정권을 강하게 질타하고 있다. 그는 2000년대 들어서도 비정규직·해고 노동자들의 전국 투쟁현장을 비롯해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운동, 용산참사 투쟁 등에 참여했다. 2011.03.23 / 강윤중 기자
민주노총이 서울 중구 정동으로 이사해 개소식을 연 날 강기갑 전 민주노동당 대표가 백기완 소장의 옷 매무새를 만져주고 있다. 2010.07.09 / 강윤중 기자
서울 잠실 올림픽 경기장에서 열린 민중 후보 선출대회에서 후보로 선출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백기완 소장.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고, 1992년 대선에서는 민중후보로 나서 24만표를 얻었다. 1992.11.02 /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 동교동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회동을 앞두고 악수하는 백기완 소장. 제 1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백기완 소장은 1987년 12월 10일과 11일에 걸쳐 각각 김영삼과 김대중을 만나서 단일화를 호소하며 후보직을 내려놓았다. 1987.12.11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7년 대선 후보 출마 당시 대학로 유세 모습. 1987.12.05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5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백기완 소장. 그는 박정희 정권 시절 대통령 유신헌법 철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하면서 1974년 3월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12년·자격정지 12년을 선고받았으나, 1975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이밖에도 1979년 ‘명동 YMCA 위장결혼 사건’과 1986년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대회를 각각 주도해 투옥됐다. 이 가운데 긴급조치 위반과 YMCA 사건은 훗날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백 소장은 일생 동안 모진 고문의 후유증을 겪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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