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의 지식카페>아침에 열리고 저녁에 닫히는 파란수련, 태양신 상징.. 영적 의식때 쓰여
■ 박원순의 꽃의 문화사 - ① 고대 이집트와 파란수련
꽃잎 여닫는 습성탓 ‘水’아닌 ‘잠잘 睡’ 써… 향기로 곤충 유혹하며 진화 거듭
갱생 의미, 1922년 발굴 투탕카멘 시신 덮고있어… 진통·최음제로 사용 說도
밤에 피는 흰수련보다 더‘대접’… 고대벽화 속 정원마다 연못·파란수련 등장
정원사로서 가끔씩 연못에 들어가 수련을 관리하다 보면 아주 가까이서 그 꽃들을 마주하게 된다. 아침 일찍 잔잔한 수면 위로 햇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환상처럼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검푸른 물 위에 점점이 떠 있던 수련들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동그랗게 펼쳐진 초록의 잎들 사이로 수련의 꽃봉오리가 점점 고도를 높이는 태양과 함께 아름다운 꽃잎을 펼친다. 꽃은 오전의 중반에 이르러 활짝 펴지기 시작해 급기야 호위병처럼 빙 둘러선 수술들 안쪽으로 눈부신 빛깔의 암술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곳에는 투명한 수분액이 보석처럼 맺혀 있는데, 마치 천상의 것과 같이 그윽하고 깨끗한 향기가 난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귀하게 여겼던 파란수련도 나일강 저지대 혹은 정원의 연못 속에서 아마도 이러한 모습으로 여름 내내 꽃을 피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집트 사람들은 왜 파란수련을 좋아했을까? 파란수련의 의미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집트 신화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특히 태양의 도시를 뜻하는 헬리오폴리스 창세 신화에 따르면, 원래 물과 어둠으로 덮여 있던 세계에 태양신이 등장하는데,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 태양신이 바로 파란수련의 꽃 속에 깃들여 있다고 여겼다. 케프리(Khepri), 라(Ra) 혹은 아툼(Atum)으로 불리는 그 신은 태초의 물에서 솟아오른 파란수련의 꽃에서 새벽마다 새롭게 태어나 세상을 밝히고 밤이면 다시 꽃 속으로 숨는다고 알려져 있다. 태양신의 젊은 버전인 네페르템은 세계의 창조 당시 파란수련에서 나왔으며, 동트기 전 가장 강렬한 꽃의 향기는 바로 그 신의 존재를 의미한다고 믿어졌다. 그래서 네페르템은 아름다움의 신, 향기의 신, 치유의 신 등으로 불린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행운의 상징으로 네페르템의 작은 조각상을 지니고 다녔다.
수련이 지구상에 등장한 것은 1억4700만 년 전이다. 공룡들이 활개 치던 육상에 침엽수, 속새, 양치류 등 민꽃식물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수중 생태계에서 수련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꽃가루와 밑씨를 생산하는 가장 초기의 꽃식물에 속하는 수련은 화려한 꽃과 향기로 수분 매개 곤충들을 유혹하며 성공적인 진화를 거듭했다.
수련이 그렇게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만들어낸 것은 곤충을 유혹하기 위해서다. 자가수정을 원하지 않는 수련은 다른 꽃으로부터 꽃가루를 받아 성공적으로 수정하기 위한 전략을 개발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수련의 꽃 안에 있는 수술과 암술이 서로 다른 시기에 성숙하도록 하는 것이다. 수련의 꽃 한 송이는 사흘 정도 피어 있는데, 먼저 첫째 날엔 암술이 활성화되고 수술은 꽃가루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첫째 날엔 사발 모양의 암술 부위에 꿀처럼 생긴 투명한 액체가 고여 있는데, 이는 벌이나 딱정벌레처럼 달콤한 꿀을 원하는 곤충을 유혹하기 위함이다. 넓은 착륙장을 제공하는 화려한 꽃잎, 그와 대비되는 색깔로 마치 꿀물이 고여 있는 듯 위장한 암술과 함께 치명적 향기에 이끌린 곤충들은 그 액체 속으로 거리낌 없이 빠져든다. 그 액체는 꿀이 아닌 그저 점성이 있는 화합물일 뿐, 곤충은 달콤함을 찾아 더 안쪽을 샅샅이 수색해 보지만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그 과정에서 다른 꽃으로부터 몸과 다리에 묻혀 온 꽃가루들은 액체에 씻겨지고 수분액이 점점 줄어들면서 그 꽃가루들은 고스란히 암술머리에 내려앉아 수정이 이뤄진다. 둘째 날, 수련 꽃은 꽃가루를 만들어내지만 수분액은 만들어내지 않는다. 다른 곤충들이 날아와 이 꽃가루들을 묻혀 또 다른 꽃으로 옮겨주면서 수련의 타가수정 메커니즘은 성공적으로 완성된다.
많은 사람이 연꽃과 수련을 혼동한다. 둘 다 같은 수련과이긴 하지만 많은 부분이 다르다. 연꽃은 꽃대가 수면 위로 높이 솟아올라 꽃이 피고 개화 후에도 꼿꼿이 서 있는 반면, 수련의 꽃은 수면 가까이에서 피고 개화가 끝나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또한 연꽃의 잎은 갈라지지 않은 반면, 수련의 잎은 깊게 갈라져 있다. 씨앗도 다르다. 연꽃은 연자라고 하는 씨앗들이 아주 단단한 종피에 싸여 수천 년 이상 생존할 수 있지만, 수련의 씨앗들은 가종피에 싸여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원래 수련의 ‘수’ 자는 물을 뜻하는 ‘수(水)’가 아니라 잠잘 ‘수(睡)’다. 꽃이 아침에 열리고 해 질 녘 닫히는 습성 때문이다. 하지만 열대 수련 중에는 밤에 열리고 아침에 닫히는 야간 개화 수련도 있다. 파란수련과 함께 이집트 미술에 자주 등장하는 흰수련이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은 태양과 같이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는 파란수련을 더 귀중하게 여겼다.
파란수련의 학명은 님파에아 카에룰레아(Nymphaea caerulea)라고 하는데, 님파에아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물의 여신 님프를 뜻하고, 카에룰레아는 파란색을 뜻한다. 파란수련은 특히 다른 수련 종류들보다 더 진하고 매력적인 향을 지녔다. 그 향기 속에는 아포모르핀과 누시페린 같은 알칼로이드 성분이 들어 있어, 아로마테라피를 위한 향수와 오일의 원료로 사용됐다.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파란수련은 강장제와 진통제, 각성제 외에 와인과 함께 음용돼 황홀한 상태에 이르게 하는 환각제, 최음제, 성기능 향상제 같은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분명한 건 축제나 종교의식 등 중요한 영적 의식이 거행되는 곳에 파란수련이 사용됐다는 점이다. 1922년 발굴된 고분에서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였던 투탕카멘의 시신은 파란수련의 꽃잎으로 덮여 있었다. 다산과 갱생의 상징이었던 그 꽃으로 영적인 환생을 꿈꿨던 것일까. 또한 각종 그림과 조각, 사원, 건물 기둥, 항아리 등 이집트 미술과 건축에 파란수련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이 꽃은 실생활과 문화 전반에 걸쳐 아주 다양하게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파란수련이 자라고 있던 이집트의 정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정원의 가장 원조 격으로서 고대 이집트의 정원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을까? 과수원과 채마밭 등 생활에 필수적인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것 외에 단순히 즐거움을 위한 관상용 정원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분명 삶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고대 테베의 벽화로 유명한 기원전 1350년경 네바문 역시 왕의 필경사이자 곡물을 담당하는 관리였다. 이집트 경제가 풍족해지면서 이들 중산층을 중심으로 즐거움을 위한 정원이 발달했다. 고대 이집트 벽화에서 그 정원들의 형태와 식물들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보통 원근감이 결여된 채 평면도와 입면도가 묘하게 결합된 구도로 묘사돼 있다. 가령 정원 배치도는 위에서 바라본 조감도이면서, 사람과 동식물, 기타 물체는 측면 혹은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이러한 그림은 오히려 그 구조뿐 아니라 세부 사항을 파악하기에 좋다. 다양한 벽화에 등장하는 정원에는 항상 직사각형의 연못이 있다. 그 연못에 파란수련도 자리를 잡았다. 연못 가장자리에는 파피루스와 같은 수변식물, 그리고 물속에는 물고기와 오리들이 노닐고 있다. 정원의 주변으로는 대추야자, 돌무화과나무, 포도나무와 같은 나무들이 줄지어 식재돼 있고, 하부에도 수레국화, 양귀비 등 다양한 꽃식물들이 아름답게 장식돼 있다. 물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진흙으로 테를 두른 정사각형 화단들이 마련됐다. 파란수련이 자라기에 이러한 환경은 완벽한 조건이었다. 정원에 사용된 관상용 식물들은 태양신을 상징하는 파란수련을 비롯해 저마다 의미를 갖고 있었다. 가령 돌무화과나무에는 죽은 자의 영혼을 사후 세계로 인도하는 하토르 여신이 깃들여 있다고 믿었다. 파피루스는 다산과 갱생을 뜻하며 종종 고대 이집트에서 기둥을 장식하는 문양으로 사용됐다.
고대 이집트 정원의 모습은 파라다이스의 전형이다. 생명 같은 물, 맘껏 따먹을 수 있는 열매, 그늘이 있는 쉼터, 즉 모든 즐거움을 위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런 정원을 만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파라다이스를 갖고자 했을 것이다.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오늘날의 사람들도 누구나 자신만의 케렌시아에 파라다이스 같은 공간을 꿈꾼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큰 나무 그늘과 연못이 있는, 사계절 다채로운 꽃들이 피어나는 넓고 근사한 정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사는 공간에 식물들을 들이고, 그 속에서 평안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나 자신의 파라다이스가 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한때 나일강 삼각주를 따라 번성하며 영화를 누리고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자랑했던 파란수련은 이제 심각한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화학비료의 지나친 사용과 인공댐 조성으로 인해 지난 수천 년을 이어온 나일강의 유기적 환경이 파괴되고 자연의 계절적 주기가 사라진 것이다.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 파괴로 점점 더 많은 식물이 급속도로 야생에서 사라지고 지구 생태계가 위협받는 이 시대, 파란수련과 이집트 정원 이야기로 살펴본 인간과 식물, 자연 생태계와 문화의 조화, 모두의 즐거움과 안녕을 위한 정원의 필요성은 앞으로 더욱더 중요한 관심사가 될 것이다.
국립세종수목원 전시기획운영실장
△박원순 = 서울대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롱우드가든 국제정원사양성과정과 델라웨어대학교 롱우드대학원과정을 이수했다. 현재 국립세종수목원에서 전시기획운영실장으로 재직 중이다. ‘나는 가드너입니다’ ‘식물의 위로’를 썼고, ‘식물: 대백과사전’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용어 설명
파란수련(Nymphaea nouchali var. caerulea) : 수련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 식물로, 아프리카 북부와 중부, 이집트가 원산지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란수련은 창조와 갱생의 상징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주간에 개화하는 별 모양의 꽃은 7월부터 늦여름까지 개화한다. 영하 1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 기후대에서 월동 가능하며, 수온 20도 이상의 고요하고 따뜻한 물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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