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에 맞서고 늘 약자 편에 섰던 백기완..사진으로 본 생전 모습

이혜리 기자 2021. 2. 1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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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이 향년 88세로 15일 별세했다. 통일문제연구소는 이날 백 선생의 부고를 전하면서 생전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 89장을 공개했다.

백 선생의 생애에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이 응축돼 있다. 그는 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서고 약자의 편에서 싸웠다.

1933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난 백 선생은 1945년 해방 이후 13세의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내려왔다. 한반도 분단이 한 가족의 분단으로 이어져 여덟 식구가 남북에 떨어져 살게 된 것은 그가 통일운동에 투신하게 된 배경이었다.

1950년대엔 도시빈민운동과 농민운동을 했고, 1960년 4·19 혁명에 뛰어들어 정치민주화와 통일운동에 나섰다. 함석헌·장준하 선생 등과 함께 반일 투쟁을 하다 구속됐고, 유신헌법 철폐를 위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 등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 반대 투쟁을 했다. 그러다 1974년 3월 긴급조치 1호 첫번째 위반자로 체포돼 징역 12년·자격정지 12년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39년 만인 2013년 8월 재심에서 백 선생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백 선생은 1986년엔 명동성당에서 이른바 ‘권인숙 성고문 사건 진상 폭로대회’를 주도하다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됐고, 이듬해 6월 항쟁에서 시민대표로 연설했다. 1987년과 1992년엔 대통령선거에 민중후보로 출마해 민주정권 쟁취와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에 힘썼다.

이후에도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밀양 송전탑 건설, 한미 FTA 저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망,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 사망 등 사회 이슈에 관심을 놓지 않고 목소리를 냈다. 백 선생은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 생활을 해왔다.

사진에 달린 설명은 사진을 촬영한 통일문제연구소와 사진사 등이 직접 적었다. 연구소 측은 주민등록상 백 선생의 출생년도가 1932년으로 돼있지만 실제 태어난 해는 1933년이며, 백 선생의 평소 뜻에 따라 1933년을 기준으로 한국식 나이계산법으로 나이를 표기했다고 설명했다.

1974년, 마흔두 살. 박정희 정권 아래 긴급조치1호 위반으로 의형제를 맺고 박정희 타도 싸움을 명세하였던 독립군 출신 장준하(1918-1975·오른쪽)와 군법재판을 받는 장면. 왼쪽이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1978년 4월 24일, 유신말기의 서슬 퍼런 시절 성공회 강당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백범사상연구소(통일문제연구소 전신, 소장 백기완)가 주최한 ‘민족문학의 밤’ 행사가 열렸다. 이날의 행사로 인해 여러 문인과 함께 백기완도 구속 수감되었다. “김지하 양성우 시인 석방하라”, “고은 백기완 선생 석방하라”는 구호가 담긴 대자보. ⓒ박용수
1985년, 쉰세 살. 광주학살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집단 단식투쟁. 김대중 민추협공동의장(가운데 서있는 사람)이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 문익환 목사가 보인다. 백기완은 왼쪽 중간 흰 옷을 입고 앉아있다. ⓒ박용수
1985년, 쉰세 살. 민통련 서울지부의장으로 현판식에서 발언하는 백기완 ⓒ박용수
1987년, 고문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자마자 유월항쟁의 거리에서 백기완은 지팡이를 짚으며 함께 했다. ⓒ박용수
1987년, 진압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1966-1987) 열사의 범국민장례식. 최민화가 그린 ‘이한열부활도’ 뒤로 지팡이를 짚으며 행진하는 백기완이 보인다. ⓒ통일문제연구소
1990년, 쉰여덟 살, 영등포시장 골목. 노동자탄압 경찰폭력 규탄 평화행진 중 진압경찰이 휘두른 방패에 맞아 실신. ⓒ통일문제연구소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 민중후보 유세 ⓒ이윤영
2000년, 예순여덟 살. 615남북정상 회담 뒤 북쪽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아 방문한 평양 대동강변에서 눈물에 젖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2008년, 일흔여섯 살. 부당해고에 맞선 기륭전자 해고노동자들의 투쟁 지지방문. 서울 금천구 가산동 기륭전자 옛공장 ⓒ정택용
2011년 6월, 일흔아홉 살. 살인적인 노동자 정리해고 중단을 촉구하며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 올라 무기한 고공농성을 벌이던 김진숙 부산민주노총 지도위원을 응원하는 1차 희망버스. 경찰과 용역의 저지선을 뚫고 공장 안에 진입, 폐기물처리 차량 위에 올라 연설하는 백기완.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1929-2018), 박창수 열사의 아버지 황지익, 원로 평화운동가 문정현 신부가 함께 했다. ⓒ노순택
2013년, 여든한 살. 22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 ⓒ정택용
2014년, 여든두 살.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만민공동회 참석 후 청와대로 향했으나 진압경찰에 가로막히다. 좌우에 민중미술가 신학철과 장경호 ⓒ노순택
2015년, 여든세 살. 쌍용차 해고자 복직과 정리해고 철폐를 위한 한겨울 오체투지 행진 중 참가자들이 경찰에 연행되자 눈물 흘리는 백기완 ⓒ이정용
2016년, 여든네 살. 백기완은 하루 아침에 자식을 잃고 비탄에 빠진 세월호 참사 유족들의 손을 놓지 않은 든든한 어른이었다. ⓒ채원희
2017년, 여든다섯 살.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규탄과 퇴진을 촉구하는 범국민촛불집회. 비가 와도 눈이 내려도 백기완은 광장과 거리에 서길 주저하지 않았다. ⓒ채원희
2019년, 여든일곱 살. 태안화력발전소 야간작업 중 컨베이어벨트에 몸이 잘려 운명한 비정규직노동자 김용균의 장례식.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기력이 쇠한 상태였지만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김용균의 영정 앞에서 백기완은 울었다. 달라지지 않는 노동자들의 현실에 피눈물을 흘렸다. ⓒ정택용
2020년, 여든여덟 살 백기완의 삶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그 중 하나는 경찰과 검찰과 법원에서 날아온 출두·조사·벌금·재판 통지서였다. 이것은 고달프고 가난한 이, 힘겹게 거리에서 싸우는 이들의 손을 잡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오랜 삶의 명예증명서가 아닌가. ⓒ채원희
여든다섯 살, 청년 백기완 ⓒ정택용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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