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환경부 블랙리스트: 직권남용죄와 '뉴 노멀'

임찬종 기자 2021. 2. 1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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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신미숙 전 비서관


문재인 정부 고위 공무원들의 조직적인 직권남용 의혹이 불거진 최초의 사건이었던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해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됐다.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와 강요죄 그리고 업무방해죄가 인정돼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함께 기소된 신미숙 전 청와대 인사수석실 균형인사비서관은 직권남용죄와 업무방해죄가 인정돼 징역 1년 6개월형에 대한 3년 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 문재인 정부 장관과 청와대 비서관의 '직권남용죄' 최초 인정

문재인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인물이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구속된 것도 처음이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비서관을 지낸 인물에게 유죄가 선고된 것은 두 번째다. 조국 전 장관의 아들과 관련된 입시비리 공범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받은 최강욱 전 공직기강비서관(현 열린민주당 국회의원)이 첫 번째였다. 다만 최강욱 전 비서관의 경우 개인적 범죄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은 것이라면, 신미숙 전 비서관의 경우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 인사와 관련해 '청와대 몫'을 확보하는 업무와 관련해 유죄가 선고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 1심 판결이 선고된 지난 10일 "재판 중인 사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던 청와대가 다음 날 입장을 바꿔 "이 사건은 '블랙리스트' 사건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도 판결의 중대성을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장관과 청와대 비서관이 공모해서 직권남용 범죄를 저질렀다는 1심 재판부의 판단은 '적폐청산'을 기치로 내걸었던 문재인 정부의 핵심 가치와 직결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적폐청산의 가장 큰 특징은 공직 사회에서 그동안 '관행'으로 간주되어왔던 여러 부당한 행위들을 직권남용죄라는 수단을 활용해 형사적으로 단죄한 것이었다. 당연한 관행으로 여겨져 왔던 국정원 정보관(IO, Information Officer)이나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들의 민간인 상대 정보수집을 '불법 사찰'로 규정해 직권남용죄로 기소한 것은 적폐청산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정권에 비판적인 문화계 인사에 대한 조직적인 지원 배제 정책인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기소된 인물들 역시 그간의 관행이었을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과 '뉴 노멀(New Normal)'

과거의 관행에 대해 엄격한 형사적 잣대를 들이댄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작업은 여론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문제는 적폐청산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과거 정부의 관행을 단죄할 때 문재인 정부가 적용했던 엄격한 새로운 기준, 이른바 '뉴 노멀(New Normal)'을 문재인 정부 역시 준수할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적폐청산의 상징인 직권남용죄로 문재인 정부의 장관과 청와대 비서관이 유죄 판단을 받은 것은 중대한 문제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가 스스로 설정한 적폐청산의 기준, '뉴 노멀'을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국 사태'와 관련해서도 '내로남불'이 문제가 됐지만,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은 현 정부의 장관과 청와대 비서관의 개인적 비리가 아니라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직권남용이라는 점에서 더 큰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가 밀어붙인 적폐청산의 수단이자, '뉴 노멀'의 기준처럼 자리잡은 직권남용죄가 문재인 정부의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해 인정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적폐청산의 대표적 사건 중 하나이자 직권남용죄와 관련한 가장 최근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를 만들어낸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에는 동일한 기준이 적용된 것일까? 환경부 블랙리스트 판결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의 연장선상에 있는 판결일까, '적폐의 반격'에 해당하는 판결일까? 이 질문들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직권남용죄가 인정되기 위한 조건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편의상 이를 '직권남용죄의 3가지 허들'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 직권남용죄 성립을 위한 '3가지 허들'

직권남용죄의 정식 명칭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이다.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고 형법 제123조에 규정돼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이전까지 직권남용죄가 실제로 적용된 사례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과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작업을 거치면서 직권남용죄는 '부당한 일을 저지른 공무원을 형사적으로 단죄하는 수단'으로 광범위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고위 공무원이 부당한 일을 저지른 사실이 폭로되고, 부당한 일을 저지른 공무원을 단죄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면, 누군가 해당 공무원을 검찰에 고발하고, 검찰이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하는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됐다.

그러나 여론의 비판을 받은 모든 공무원이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된 것은 아니다. 직권남용 혐의로 검찰이 기소한다고 하더라도 무죄가 선고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불기소 박찬주 전 육군 대장은 공관병들에게 부적절한 '갑질'을 한 사실이 상당 부분 인정됐지만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되지 않았다. 최근 국회에서 탄핵소추된 임성근 부장판사 역시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수석부장 판사로 일할 때 재판에 개입한 사실이 인정돼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됐지만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직권남용죄에 대한 불기소 처분이나, 무죄 판결이 모두 법리적으로 타당하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적폐청산 작업 이후 직권남용죄로 기소되는 사건이 크게 늘어나면서 법원이 직권남용죄에 대해 훨씬 엄격하고 세밀한 기준을 만들어 적용되기 시작한 것 역시 사실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직권남용죄가 인정되기 위해 넘어야 할 허들, 직권남용죄가 인정되기 위한 조건은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

[조건 1] 어떤 행위가 부당하거나 불법적이어야 한다.

[조건 2] 해당 행위가 공무원의 직무상 권한(직권)의 범위에 있어야 한다.

[조건 3] 공무원이 직권을 행사한 상대방이 (하급) 공무원일 경우, 해당 행위 때문에 하급자가 법령 등에 명시된 기준을 위반하는 일이 벌어져야 한다.

[※참고: 논리적으로는 조건 2 → 조건 1 → 조건 3 의 순서로 직권남용죄 성립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문제가 되는 행위가 해당 공무원의 직권 범위에 속하는지 먼저 판단한 뒤에, 그 행위가 직권을 남용한 것에 해당하는지, 즉 부당한 일을 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법 논리상 타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무원의 부당한 행위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형성된 이후 법적 판단이 이뤄지고 있고, 일반적인 사건의 진행 순서대로 이야기를 따라가는 편이 읽는 사람이 이해하기 편하기 때문에 조건 1 → 조건 2 → 조건 3의 순서로 설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 조건 1. 해당 공무원의 행위가 부당하거나 불법적이어야 한다.

첫 번째 허들인 [조건 1]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어떤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일단 해당 행위가 부적절하거나 부당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임성근 부장판사 등 사법농단 관련자들에 대한 검찰 수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나,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이나 우병우 전 민정수석 사건에 대해 직권남용죄로 기소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형성된 것도, 이들의 행위가 부적절하다는 점에 대해 많은 사람이 상직적 차원에서 공감했기 때문이다. 여론과 법적 기준이 부딪치는 지점은 주로 [조건 2]와 [조건 3]다. 고위 공직자가 부당한 일 때문에 기소되었는데도 검찰이 기소를 하지 않거나, 법원이 무죄를 선고한다고 비판받는 것도 이 두 가지 조건과 관련해 상식적 관점과 형사법적 판단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이 가운데 두 번째 허들, [조건 2]는 비교적 일찍부터 확립되어 있던 것이다. 공무원이 부당한 일을 하거나 지시했다는 이유만으로는 직권남용죄로 형사처벌할 수 없고, 공무원의 부당한 행위가 해당 공무원의 직무상 권한(직권)의 범위 안에 있어야만 처벌할 수 있다는 조건은 과거부터 직권남용죄의 성립 여부를 따지는 중요한 기준으로 적용되어왔다. 예를 들어 어떤 부처 국장이 자신에게 접대를 하지 않은 업체에 대한 인허가를 취소하라고 부하 직원에게 지시한 행위는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업체에 대한 인허가는 해당 국장의 직무상 권한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부하 직원에게 업체 관계자에게 욕설을 퍼부으라고 지시하는 것은 '나쁜 일'이긴 하지만 직권남용으로 볼 수 없다. '욕설' 또는 '욕설 지시'는 해당 국장의 직무상 권한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부하 직원이 상급자의 지시 때문에 실제로 욕설을 했다고 하더라도, 욕설을 하게 만든 상급자는 "지위를 이용한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규정될 뿐 직권남용죄로 처벌되지는 않는다.

● 조건 2. 해당 공무원의 행위가 직무상 권한의 범위에 있어야 한다.

[조건 2], '직권의 범위' 때문에 무죄가 선고된 대표적인 사례는 앞서 언급한 임성근 부장판사 사건이다. 임성근 부장판사가 프로야구 선수나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관련 재판에 개입한 것은 이론의 여지없이 부적절한 행위로 볼 수 있다. 임성근 부장판사 사건을 담당했던 1심 재판부는 이를 "위헌적(違憲的)"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임성근 부장판사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1심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에 대한 직무상 권한은 오로지 독립된 재판부에만 있을 뿐, 재판부 구성원이 아닌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에게는 재판에 개입할 직권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위를 이용한 불법행위"일 수는 있지만 "직권남용죄"는 아니라는 논리다.

직권남용죄 성립을 위해 넘어야 할 세 가지 허들 중 가장 최근들어 확립된 것은 [조건 3]이다. 공무원이 부당한 일을 저질렀고, 문제의 부당한 행위가 공무원의 직권 범위 안에 있는 것이었다고 해도 직권남용죄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세 번째 허들도 넘어야만 한다. 직권남용 행위의 영향을 받은 상대방이 공무원(하급자)일 경우, 직권을 남용한 상급자의 행위 때문에 하급자가 업무와 관련해 법령 등에 명시된 의무나 기준을 위반하게 된 경우에만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가 성립한다는 조건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하급자의 업무와 관련해 법령 등에 명시된 기준과 원칙이 별도로 없으면 상급자가 상식적 관점에서 명백히 부당한 지시를 했다고 하더라도 직권남용죄로 처벌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직권남용의 세 번째 조건

흥미로운 것은 이 기준이 확립된 것이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서라는 점이다. 대법원은 2020년 1월 30일 선고한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성립을 위해서는 '직권남용' 부분과 '권리행사방해' 부분이 모두 충족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즉, 직권을 남용한 부당한 행위 (= 조건 1 + 조건 2)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상대방의 권리행사를 실제로 방해했거나 상대방에게 의무에 없는 일을 실제로 하게 만든 경우에만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로 처벌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의무에 없는 일"이냐는 것이었다.

대법원은 공무원이 민간인을 상대로 직권을 남용한 경우와 관련해서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성립 요건을 까다롭게 판단하지 않았다. "직권남용 행위의 상대방이 일반 사인(私人)일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공무원의) 직권(행사)에 대응하여 따라야 할 의무가 없으므로 그에게 어떤 행위를 하게 하였다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할 수 있다."라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문제는 공직사회의 과거 관행을 단죄하는 적폐청산 과정에서 등장한 하급 공무원에 대한 상급자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한 판단이다. 즉, 상급자의 직권을 남용한 행위의 대상(상대방)이 하급자인 공무원인 경우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은 직권남용 행위의 상대방이 (하급)공무원일 경우, 상급자의 지시와 관련한 "법령상 의무가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공무원은 "법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지위에 있으므로 그가 (상급자의) 직권(행사)에 대응하여 어떠한 일을 한 것이 의무 없는 일인지 여부는 관계 법령 등의 내용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법원은 "법령(이나) 그 밖의 관련 규정에 따라 직무수행 과정에서 준수하여야 할 원칙이나 기준, 절차 등을 위반하지 않는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대법원 2018도 2236 판결)라고 판단했다.

다시 말해 상급자가 하급 공무원을 상대로 직무상 권한과 관련해 (=조건 2) 부당한 일을 하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조건 1), 이 일 때문에 하급자가 법률이든, 부서 운영지침이든, 업무 매뉴얼이든 어딘가에 규정되어 있는 명시적 기준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면 "의무에 없는 일"을 하게 만든 것이라 볼 수 없고, 따라서 직권남용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기준(= 조건 3)을 확립한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공적인 문서에 명확히 규정되어 있는 업무 관련 기준을 위반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면 하급자에게 직무상 권한과 관련된 부당한 일을 지시했다고 하더라도 형사처벌은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법령이나 문서 등으로 명확하게 기준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영역에 대한 지시는 비록 헌법이나 상식 등에 비춰볼 때 부당하다고 해석되더라도 직권남용죄로 처벌되지는 않는다고 판단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이 판결을 통해 대법원은 공직사회의 '관행'에 적용되는 직권남용죄의 기준을 과거에 비해 엄격하게 설정한 것이다.

● '문화계 블랙리스트 기준' 엄격히 적용한 환경부 블랙리스트 판결

그렇다면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에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동일한 기준이 적용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조직적 직권남용 혐의에 대한 첫 판례로 볼 수 있는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 1심 판결은 대법원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판결을 통해 제시한 직권남용죄의 기준을 충실하게 반영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재판부는 김은경 전 장관과 신미숙 전 비서관에게 적용된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일반적 직무권한이 있는지(조건 2)', "직권남용에 해당하는지(조건 1)", "대상자에게 의무에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인지(조건 3)"의 세 가지 기준을 각각 적용해 개별 사안마다 다른 판단을 했다. 특히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확립된 직권남용의 세 번째 조건, 공무원이 하급자에게 "의무에 없는 일"을 시켰다고 인정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했다.

예를 들어 '청와대가 내정한 낙하산 인사들이 합격할 수 있도록 공모 결과를 사실상 사전조작한 행위'에 대해서도 김은경 전 장관의 행위가 환경부 공무원들을 상대로 한 것인지, 아니면 산하기관 임원을 선발하는 임원추천위원회 위원들을 상대로 한 것인지에 따라서 재판부는 각각 다르게 판단했다. 재판부는 환경부 소속 인사담당 공무원(운영지원과장)은 장관의 인사권 행사를 실무적으로 단순 보좌하는 역할에 불과하고, 이와 관련해 환경부 소속 실무자의 고유한 업무 영역을 규정한 법령이나 지침이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장관 등이 청와대가 낙점한 후보의 자기소개서를 대신 써주는 일 등을 이들에게 사실상 지시한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이는 법령이나 업무 지침에 명시된 기준을 위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환경부 소속 공무원들에게 "의무에 없는 일"을 하게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직권남용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김은경 전 장관이 같은 행위를 공공기관 임원추천위원회 위원들을 상대로 한 것에 대해서는직권남용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환경부 소속 공무원과 달리 공공기관 임원추천위원들은 임원 선발 업무와 관련된 고유한 권한과 업무 처리 기준이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명시돼 있고, 이들이 법에 명시된 기준을 위반하도록 만든 행위는 "의무에 없는 일"을 하게 만든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직권남용죄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결국,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판결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과는 다른 기준을 적용한 '적폐의 반격'이 아니라,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적용됐던 기준이 오히려 엄밀하게 적용된 판결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비록 대상이 문재인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이지만 적용된 기준과 가치만 놓고 보면 적폐청산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사법농단 사건 이후 직권남용죄의 성립 범위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대법원이 새롭게 제시한 기준을 적용했음에도 유죄가 선고된 점이 의미심장하다. 적어도 1심 재판부가 보기에는,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은 문재인 정부가 추진했던 적폐청산 사건들보다 더욱 엄격하고 협소한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관련자들에게 실형을 선고해야 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 '블랙리스트'가 아니라는 '지록위마(指鹿爲馬)'

따라서 "이 사건은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이 아닙니다. 이 사건을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은 유감입니다."라는 청와대 강민석 대변인의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부당한 이유로 특정인들에게 불이익을 주기 위해 만든 명단'을 '블랙리스트'에 대한 상식적인 정의(定義)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 사표를 제출할 의무가 없는 사람들에게 사표 제출을 요구하고, 사표 제출을 거부하는 사람을 별도로 분류하고, 사표 제출 거부자를 표적 감사하도록 관련 기관에 지시하고, 이와 관련된 여러 건의 문서를 환경부 공무원이 작성해 장관과 청와대 비서관에게 보고한 사건을 '블랙리스트 사건'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청와대 대변인 말대로 "재판부의 설명자료 어디에도 '블랙리스트'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라는 점을 이 사건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규정해서는 안 되는 근거로 삼는다면, "물의 야기 법관 명단"이라는 제목의 문건 등만 존재할 뿐이고 비수도권 배치나 해외 연수 배제 같이 사표 요구보다 훨씬 가벼운 인사 불이익을 주는 방안만 언급된 '판사 블랙리스트 사건' 등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규정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해 문재인 정부는 적폐청산 과정에서 스스로 제시했던 '뉴 노멀'을 무너뜨렸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만약 적폐청산 과정에서 내세웠던 '뉴 노멀'이 국정을 운영하면서 실천하기에는 너무 엄격한 기준이었다고 판단된다면, 이제라도 솔직하게 고백하고 스스로 설정한 기준을 지키지 못한 점에 대한 정치적·윤리적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 '환경부 블랙리스트는 블랙리스트가 아니다.'라고 우기는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우리 사회는 진실 대신 진영논리가 지배하는 아수라장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권력이 있을 때는 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고 믿으라고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있다. 하지만 권력이 사라지는 순간, '지록위마(指鹿爲馬)'라고 윽박질렀던 사람들 중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은 이는 많지 않았다. 역사는 권력이 진실을 대하는 방식을 평가하기 마련이다.   

임찬종 기자cjy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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