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만지던 유대인의 핍박

한겨레21 2021. 2. 15.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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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스라엘, 그 발명된 신화들]중세 유럽 지배층과 피지배층 연결 역할.. 십자군 운동 일어나며 '반유대' 등장
유럽에서 11세기 십자군 운동이 일어나며, 유대인을 외모적으로도 다르게 그리는 등 인종적인 차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수를 유대교 종교재판소에 넘기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그린 12세기 영국의 성화. 구부러진 코 등으로 유대인을 다르게 그리고 있다. REUTERS

유대인(Jews)이란 단순히 유대교를 믿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 세계에서 기독교도라는 다수에게 필요한 소수 집단으로서 유대인이 자리매김됐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로마에서 국교로 인정된 때부터 18세기 말 프랑스대혁명까지 유대인들은 기독교 세계에 유폐된 선택된 백성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합의가 양쪽 사이에 있었다. 기독교도나 유대인 자신들이나 서로가 다르고 분리된 존재임을 인정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종교적 교리 차원의 문제이기도 했다.

로마가 사라진 자리, 행정·외교 담당 집단으로

로마가 제국을 확장하면서 유대교도 퍼져나갔다. 유대인은 기원전 2세기에 이탈리아, 기원전 1세기에 프랑스, 수백 년 뒤에는 에스파냐까지 진출했다. 3세기 말에는 유럽 북쪽의 독일 쾰른까지 들어갔다.

이런 유대인은 로마가 사라진 자리에 세워진 게르만족 계열 왕국들에서 초기에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맡는다. 로마제국 멸망 뒤는 야만족의 침입으로 기존 상업·교역망이 붕괴된 암흑기였다. 지중해 전역에 퍼진 공동체 네트워크를 유지한 유대인들을 통해 교역과 상업이 그나마 유지됐다. 야만족이 세운 왕국에서는 왕이나 귀족도 글을 읽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문해력을 갖춘 집단은 성직자 계급인 사제와 유대인뿐이었다. 율법 교육으로 문해력을 갖춘 유대인들은 세수 등 행정, 교역과 외교를 담당하는 특수 집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유대인이 초기 기독교 중세 세계에서 접착제, 윤활유 역할을 맡았다.

이탈리아에 정착한 5세기 말 동고트족 왕국의 테오도리크 대제는 유대인을 로마·나폴리·베네치아·밀라노, 새 수도인 라벤나 등 왕국의 대부분 도시에 정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8세기에 서유럽을 통합한 프랑크 왕국을 건설해 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 현대 유럽의 원형을 만든 샤를마뉴 대제는 유대인들을 초청하기까지 했다. 유대인에게 관대한 자치 정책을 허용했다. 유대인들이 도시에 살면서 산업을 일으키고 상업으로 국경을 넓히기를 기대했다. 많은 유대인이 샤를마뉴 왕궁의 고위 공무원이 됐다. 특히 외교 분야에서 활약했다.

교회 역시 유대인을 배려하기도 했다. 1084년 슈파이어의 대주교가 슈파이어에 유대인을 정착시키려고 유대인 구역에 방호벽을 건설하는 등 특혜를 보장했다. 유대인 공동체는 1066년 이후 라인강 하류 지방에서 강변을 따라 잉글랜드까지 뻗어나갔다.

유대인 공동체가 확장되자 압력과 박해도 나타났다. 1007년 프랑스에서 박해, 1012년 마인츠에서 개종 압력이 대표적이다. 11세기 십자군 운동은 유대인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십자군 운동 자체가 기독교도 주민들에게 정체성을 불어넣었다. 이교도에 점령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십자군 운동은 기독교도인 ‘우리’와 이교도인 ‘저들’을 인식하고 구분했다. 십자군이 유럽의 유대인 마을을 공격한 것은 명분상으로는 이단 척결이었다.

1095년 클레르몽페랑에서 처음 소집된 십자군은 다음해인 1096년 프랑스 루앙에서 유대인 마을을 습격해 학살을 저질렀다. 곧 라인강 연안 전 도시로 퍼져나갔다. 현실적으로는 약탈에 불과했다. 유대인들이 현금을 많이 보유한 것도 십자군에게 좋은 표적이 됐다.

‘유대인=고리대금업자’, 경멸받아야 할 존재 인식

유대인을 외형적으로 구분하는 표지도 등장했다. 유대인의 모습도 기독교도와 달라졌다. 유대인은 구부러진 코, 물갈퀴가 있는 발이 달린 존재로 그려졌고, 심지어 악마의 모습으로 형상화됐다. 이는 근대로 갈수록 인종적인 반유대주의(anti-Semitism)로 진화했고,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절정에 올랐다.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첫째, 11세기까지 기독교 세계와 교회는 유대인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자신들의 생존이 절박했기 때문이다. 11세기를 넘어가면서 중세 봉건사회가 정착되자, 기독교 세계와 교회는 유대인을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둘째, 로마 멸망 뒤 초기 기독교 봉건세계에서 사회와 경제를 지탱하는 한 축의 역할을 하던 유대인의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점차 기독교도 주민들로 대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3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유럽 각국의 유대인 추방은 대금업 등 유대인이 맡았던 직종을 기독교도 주민이 접수하려는 배경이 있었다.

이런 사태 뒤에는 차곡차곡 쌓여온 기독교도 주민의 반유대인 정서가 있었다. 멸시와 열패감이라는 양가 감정이었다. 이는 유대인이 기독교 봉건 세계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연결하는 중간숙주 계급 역할을 맡은 것과 관련이 깊다. 영주 등 지배계급에게 유대인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일구고 관리하는 데 필요한 존재였다. 다른 한편, 주민들에게 유대인은 영주를 대신해 세금을 징수하는 대리인이거나 돈을 빌려주는 대금업자였다. 유대인은 주민들에게 고혈을 빨아가는 착취자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에게 유대인은 종교적으로나 경제사회적으로 마땅히 경멸받아야 할 유해한 존재였다. ‘고리대금업자로서 유대인’이 이런 인식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대금업과 유대인의 관계는 유대인 문제를 관통하는 핵심 사안이기도 했다. 이는 종교·경제·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결부된 역사적 결과이다.

첫째, 중세에서는 기독교가 이자 수익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해 금지했기 때문에, 유대인에게 대금업자 역할이 넘겨졌다. 유대인은 기독교 교리를 적용받지 않는 기독교 세계 내 타자였기에 고리대금업을 하는 것이 문제가 없었고, 악역을 떠맡은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차별은 중세 봉건체제에 속하지 못하는 존재로 현실화됐다. 봉건체제의 사회경제적 토대인 토지를 받을 수 없어서 농민이 될 수 없었고, 장인 등 수공업자 조합인 길드에도 낄 수 없었다. 중세 봉건체제가 굳어지면서 유대인에게 남겨진 것이라곤 기독교가 부정하는 돈놀이, 즉 이자 수익에 기댄 대금업자 정도였다. 또 토지에 묶여 있지 않던 유대인들은 마을이나 도시를 돌아다니는 행상이나 교역 등 상업 활동에 종사했다.

1945년 1월부터 미텔바우-도라 나치 수용소에서 옮겨진 포로들의 주검이 뵐케 막사의 마당에 놓여 있다. 위키피디아

‘봉건제도에서 배제’로 되레 자유 얻어

봉건제도는 단 세 계급만을 위한 것이었다. 11세기 유머를 빌리면 “전쟁했던 귀족, 기도했던 성직자, 마지막으로 노동했던 농노”가 바로 세 계급이다. 시민이나 상인 계급은 없었다. 이 틈을 채운 것이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은 중세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차별받고 유폐된 결과, 봉건체제에서 제외됐다.

역설적으로 유대인이 봉건체제에 얽매이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기독교도들은 봉건체제 안에 갇혀 살며 거주 이전과 직업 선택의 자유를 잃었다. 반면 유대인은 상대적인 거주 이전과 직업 선택의 자유를 누렸다. 기독교도가 봉건제도 안에 갇혀 지낼 때 유대인은 그 제도 밖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살았다. 교회는 그 조처가 자기 쪽 사람들은 감옥에 가두고, 유대인은 해방시켰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둘째, 대금업으로 상징되는 유대인의 직업과 경제적 역할은 유대인 공동체의 진화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선택한 측면이 크다. 유대교가 지중해 세계에 전파될 때 도시 중심으로 공동체가 형성됐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은 대부분 농민이었던 반면, 지중해 전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도시 지역에서 개종한 유대교도들로서 처음부터 농민이 아니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중세 기독교 세계 초기부터 농업이 아닌 상업·행정·금융 등에 종사했다.

무엇보다 유대교 공동체가 유대인의 사회경제적 활동과 지위를 도시의 전문직으로 굳혀갔다. 서기 70년 예루살렘 대성전 함락 이후 유대 신앙의 주류로 자리잡은 랍비 유대교와 그 공동체가 성원들이 토라를 읽고 쓸 수 있도록 6~7살 때부터 시너고그 등에서 초등교육을 실시하는 등 문해력을 갖추도록 한 결과이다.

이탈리아 보코니대학교의 경제사학자 마리스텔라 보티치니와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교의 경제학자 즈비 에크스테인은 랍비 유대교 공동체의 교육이 유대인의 사회경제적 역할, 디아스포라, 인구 변화를 규정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랍비 유대교가 유대교 공동체 성원에게 요구한 의무적인 초등교육 등은 유대인에게 탈농업이 아니면 개종을 강제했다. 고대와 중세 때 의무적 초등교육과 문해력은 농업에 종사하던 대부분 주민에게는 너무나 큰 비용이 드는 일이었다. 농업에 계속 종사하려는 유대인들로서는 결국 개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 공동체에 남은 성원들은 자신의 문해력 등으로 농업이 아닌 더 수익이 높은 도시의 전문기술직을 찾아서 전세계적인 자발적 대이산으로 나아갔다는 분석이다.

의무적인 초등교육에서 더 나아가 토라 율법을 바탕으로 한 통일된 율법체계, 랍비 법정과 레스폰사(종교 질문에 대한 답) 등 법적인 제도와 장치는 거래와 계약 발효· 촉진에서 유대인에게 선진적이고 큰 우위를 제공했다. 또 지중해 전역, 나아가 아라비아해 연안까지 퍼진 유대인 네트워킹에 따른 원거리 교역과 차익거래 등에서도 유리한 입지를 조성했다. 유대인이 금융과 교역에서 독점적이고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배경이다.

유대인의 사회·경제적 역할 기독교인이 맡아

중세 봉건체제의 안정화로 유대인이 맡았던 사회경제적 역할에 기존 기독교도 주민이 진출하면서, 세속 세계에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제도화된다. 계기는 앞서 밝힌 것처럼 십자군 운동이었다. 교회 역시 교리 차원의 유대인 분리와 유폐를 현실의 공식적인 정책으로 채택한다.

1215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세는 라테란 공의회에서 유대인에게 노란 배지 등의 착용 강제 등 반유대 칙령을 제정했다. 이로써 기독교 세계에서 유대인에 대한 유폐와 차별은 세속 세계의 공식 정책이 됐고, 조직적 박해가 뒤따른다. 이베리아반도에서 무슬림 세력을 몰아내고 기독교 왕국이 세워진 뒤 1492년부터 유대인 대량 추방이 이어졌고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유폐, 박해를 본격적으로 제도화하는 계기가 됐다. 곧 유대인은 기독교 주민과 분리된 장소인 게토에 거주해야만 했다. 유대인을 격리하고 유폐하는 목적의 게토는 1516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세워지면서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유대인 유폐 구역인 게토는 슬럼가를 상징하는 보통명사로 바뀌게 된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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