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이름 적힌 영장으로 불법 압색"..성 착취범의 항변, 결과는?

김채린 2021. 2. 15.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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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채팅 앱을 통해 한 남성을 만나게 된 초등학생 A 양. 이 남성의 재촉과 지시에 따라 본인의 몸을 촬영한 사진 5장을 보냈습니다. 이후 A 양은 이 남성과의 연락을 차단했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 남성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건 1년 후였습니다.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다시 연락을 해달라고 요구한 겁니다.

A 양이 이를 거절하자 남성은 "네 페친(페이스북 친구) 하나하나 개인 톡 날려주마. 나 지금 공유한다. XX만큼 X되게 해주마"라고 협박한 뒤, 과거 A 양이 보냈던 사진 5장을 A 양의 페이스북 친구 3명에게 욕설과 함께 전송했습니다.

A 양의 부모는 나흘 뒤 딸이 성폭력을 당했다는 취지로 경찰서에 진정서를 냈고, 경찰은 성 착취물 제작과 유포 범행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경찰은 우선 페이스북에서 관련 정보를 압수수색해, A 양과 대화한 계정의 접속 IP 가입자인 중년 여성을 찾아냈습니다.

이 여성은 남편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 그리고 아들로 추정되는 고등학생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주민등록상 조사됐는데요. 경찰은 해당 고등학생을 이 사건의 피의자로 특정하고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했습니다.

이에 법원은 페이스북 접속지와 해당 고등학생의 신체 및 소지·소유·보관하는 물건(휴대전화, 컴퓨터 등 디지털기기와 저장매체)에 대한 압수수색을 허용하는 영장을 발부했습니다.

■ 압수수색 현장에서 들려온 말…"진범 따로 있다"

사흘 뒤 경찰관 3명은 영장을 들고 압수수색 장소인 지역의 한 아파트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범인인 줄 알았던 고등학생과 그 어머니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경찰이 수사 중인 범행의 피의자가, 해당 고등학생이 아닌 그의 형 이 모 씨라는 겁니다.

"엄마가 하는 말이, '○○(동생)가 아니다. ○○는 애초에 스마트폰을 안 쓰고, ◇◇(형)가 한 거다'라고 대번에 이야기하더라고요. […] 그래서 거주지에 주민등록된 게 없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 '◇◇는 (같이 살고는 있는데) 할머니댁인가 외할머니댁으로 주소가 변경돼 있다'고. […] ◇◇가 현재 여기에 있냐라고 하니까 '여기 이쪽 방에 있다'고 엄마가 이야기하셨고, '지금 근처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장은 제시했던 거 한 부밖에 없어서 엄마한테 영장을 제시해 보여주고 방에 있는 물건들에 대한 압수를 진행한 다음 ◇◇ 근무지로 이동했습니다." (담당 경찰관 법정 증언)

상황을 파악한 경찰은 일단 이 씨의 방에 있던 휴대전화 3대와 태블릿PC, 외장하드를 압수했습니다. 이후 집 근처에서 일하고 있던 이 씨를 찾아가 소지하고 있던 휴대전화 등을 동의하에 제출 받았습니다.

이렇게 확보된 증거물에선 이 씨가 '랜덤 채팅' 등을 통해 만난 아동·청소년 피해자 20여 명의 성 착취물, 그리고 이 씨가 인터넷에서 다운로드 받은 아동·청소년 성 착취물 340여 건이 발견됐습니다.

■ 변호인 "동생 이름 적힌 영장으로 압수수색…위법 수사"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 받은 이후 항소심에서 대형 로펌의 전관 변호사를 선임한 이 씨는, 경찰의 압수수색 과정을 여러모로 문제 삼았습니다.

특히 경찰이 이 씨가 아닌 그의 동생을 피의자로 특정해 압수수색 영장을 받았기 때문에, 이 씨에게는 영장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 씨의 변호인은 형사소송법 219조와 114조는 압수수색 영장에 '피의자의 이름'을 기재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영장 집행은 특정된 피의자에 관해서만 가능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범행을 저지른 사람이 영장 상의 피의자가 아닌 이 씨임을 알게 된 이상, 경찰은 영장 집행 절차를 중단하고 이 씨를 피의자로 특정한 영장을 법원에서 다시 발부받아 왔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울러 당시 증거인멸의 우려 등 영장 집행이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동생 이름이 적힌 영장으로 이 씨 방을 압수수색했고, 그 과정에서 이 씨의 참여를 배제했다면서 "이는 피의자의 참여권을 규정한 형사소송법 219조, 121조에 위반된다"고도 변론했습니다.

"저도 (판사 시절) 영장 전담을 2년 정도 했는데, 제가 실무를 할 때 수사기관이 피의자 특정을 잘못해서 영장을 반환하고 다시 영장을 발부받아간 경우가 있었습니다. 인적사항과 이름을 잘못 기재했다면, 영장을 경정 내지 정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는 아예 다른 사람이고, 실제로 혼동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정확히 특정했고 영장 집행에 착수하기 전 다른 사람이라는 걸 경찰이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영장을 당연히 다른 사람, 이◇◇ 것으로 재발부받아 집행했어야 합니다. […] 명백히 위법한 영장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경우가 실무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씨 변호인 변론 중)

■ 법원 "피의자 아닌 피의사실이 핵심…영장주의 위반 아냐"

변호인의 주장이 타당한지 살피기 위해, 담당 재판부는 압수수색 관련 규정인 형사소송법 215조를 먼저 살폈습니다.

이 조항에 따르면, 경찰은 수사에 필요한 때 "피의자가 죄를 범했다고 의심할 만한 정황이 있고 해당 사건과 관계가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에 한정해" 영장을 발부받아 압수수색을 할 수 있습니다.

재판부는 당시 경찰이 영장 청구 및 발부, 압수수색 과정에서 일관되게 " 이 씨가 행한 범행"에 관한 수사를 진행하는 것으로 인식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경찰들이 영장을 신청하며 기재한 피의사실은 결국 동생이 아닌 이 씨의 범행이라 할 것이고, 판사 역시 이 씨의 범행에 관해 영장을 발부해준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씨의 어머니 역시 영장에 적힌 피의사실이 이 씨의 범행이라고 인식하고 영장 집행에 참여했다고 재판부는 덧붙였습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영장이 피고인(이 씨)에게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변호인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재판부는 또 수사 초기에 경찰은 범인이 사용한 계정의 IP까지만 확인할 수 있었고, 그럼에도 형사소송법 규정상 피의자를 특정해 영장을 신청해야 했기 때문에 결국 혐의사실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을 일단 피의자로 최대한 특정한 것이라며 이 절차에 문제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변호인이 변론의 근거로 든 형사소송법 219조와 114조가 압수수색 영장에 피의자의 이름을 기재할 것을 규정하고 있긴 하지만, 이같은 조항의 취지는 '피의사실'을 최대한 특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재판부는 설명했습니다.

형사소송규칙에서도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에 있어 "피의자가 분명하지 않은 때에는 인상과 체격, 그 밖에 피의자를 특정할 수 있는 사항"을 기재할 수 있도록 하고, "피의자의 이름"을 반드시 특정하라고 요구하고 있진 않은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어 "피의사실을 피고인이 행한 범행이라고 보는 이상, 해당 영장으로 압수수색을 한 것은 적법하다"며 "달리 영장을 재발부받아야 하는 경우였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 법원 "증거인멸 우려 있던 상황…참여권 침해 안 돼"

영장 집행 과정에서 이 씨의 참여권이 침해됐다는 변호인의 주장 역시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형사소송법은 수사기관이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할 때 원칙적으로 미리 집행의 일시와 장소를 피의자 등에게 통지해야 한다고 정해뒀지만, 사전 통지시 증거물을 숨길 염려 등이 있는 "급속을 요하는 때"에는 통지를 생략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재판부는 이 씨 사건도 압수수색 일정 통보를 생략할 수 있는 경우였다고 봤습니다. 증거 삭제가 손쉬운 디지털성범죄의 특성을 고려한 것입니다.

또 압수수색 당시 이 씨가 집에 없었고, 만약 경찰이 이 씨에게 연락해 압수수색 절차에 참여하도록 통지했다면 이 씨가 당시 갖고 있던 휴대전화에 저장 중인 증거들을 모두 없애버릴 우려가 있었다고도 재판부는 설명했습니다.

재판부는 아울러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할 때 반드시 피의자가 참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피압수자(이 사건에서는 이 씨의 어머니)가 참여하는 경우에도 적법하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씨 측은 이밖에도 경찰 압수수색 절차상의 다른 문제들을 지적해 결국 징역 3년으로 감형을 받았지만, 항소심에도 불복해 상고한 상태입니다.

김채린 기자 (dig@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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