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되나요] "가정사까지 청와대에 하소연하나"..국민청원 남발에 피로감

전승엽 2021. 2. 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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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외부와 단절된 채 하루하루 스러져가는 영화배우를 구해 주세요."

지난 5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글 하나가 삽시간에 전국적인 화제가 됐습니다.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의 여배우가 배우자와 딸로부터 외면받은 채 치매와 당뇨로 투병 중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인데요.

게시판 관리요건에 따라 사람들의 실명은 가려졌지만 글의 내용을 토대로 대중들은 영화배우 윤정희(본명 손미자)와 피아니스트 백건우 부부의 이야기라는 것을 유추해냈습니다.

1976년 결혼 후 해외 연주 등에 늘 동행하면서 다정한 모습을 보여 '잉꼬부부'라는 이야기를 듣던 윤씨와 백씨 부부.

이들이 별거 상태인데다 윤씨가 '방치되고 기본 인권을 박탈당했다'는 자극적인 이야기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는데요.

이에 백씨의 국내 소속사는 입장문을 내고 "해당 내용은 거짓이며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이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누리꾼들은 청원글 작성인 혹은 백씨를 두둔하며 갑론을박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대체 이게 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거냐"는 반응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이제 가정사로 청와대 청원까지 하냐"

"가족간의 문제는 가족끼리 해결하라"

윤씨의 거취를 두고 정부의 도움이나 국민적 관심을 유도한 게시자의 의도와는 달리 개인사를 정부와 시민들의 소통 공간에 올렸다며 '역풍'을 맞은 겁니다.

'국민이 묻고 청와대가 답한다'는 철학을 전면에 내세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은 국정 현안과 관련해 국민 다수의 목소리가 모여 30일 동안 20만 이상 추천 청원에 대해서는 정부 및 청와대 책임자가 답하겠다는 약속을 내걸고 운영 중인데요.

3년간 운영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통해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소방공무원 국가직 전환' 등 각종 사회 문제와 현안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특히 음주운전자에게 꿈많은 청년이 희생된 사건 관련 청원을 통해 이른바 '윤창호법'이 제정되는 등 국민들의 목소리가 실질적인 제도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게시판의 원래 취지와 어긋난 청원글 또한 우후죽순 올라오면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의 정체가 모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법무부와 검찰의 갈등이 심화하던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해 초에 걸쳐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탄핵 청원과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 청원이 번갈아 게시판에 올라오는가 하면 청원글에 동의를 눌러주는 대가로 돈이 오간 정황이 포착되는 등 게시판이 정쟁의 장으로 악용되기도 했는데요.

또한 개인적인 원한 관계 등을 근거로 한 사법처리 요구 등 국민과 정부가 함께 논의해야 할 이유가 없는 글까지 다수 올라오면서 대학생들이 익명으로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시판의 이름에 빗대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청와대학교 대나무숲'이라고 조롱하는 사람들까지 생겼습니다.

이에 청와대는 2019년 "중복된 내용의 청원이나 무분별한 비방·욕설 등이 담긴 청원 등의 노출을 줄이고 국민의 목소리를 효율적으로 담겠다"며 국민청원 게시판을 개편했습니다.

이후 100명 이상의 사전동의를 얻은 글만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정식으로 오를 자격을 얻게 됐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윤정희-백건우 부부를 대상으로 한 청원글처럼 개인적인 문제를 다룬 데다가 사실관계 확인도 되지 않은 글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통해 일파만파 퍼지는 경우가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국책연구소인 한국행정연구원은 지난해 8월 '온라인 시민소통 및 참여 플랫폼의 역할과 한계 : 청와대 국민청원제도 운영 성과 및 개선방안' 보고서를 통해 "사전동의 절차 도입 후에도 청와대 국민청원 글 상당수는 여전히 국정 현안과 관련이 적은 정치적 견해 표출이나 중대 범죄에 대한 엄벌 요구 등이 다수"라며 청와대 국민청원제도가 내실 있는 시민-정부간 소통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제도의 추가 개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국민들이 청원을 통해 무엇을 물을 수 있는지 혹은 없는지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설명하고 '20만 이상의 동의'처럼 수치에 근거하기보다는 청원 내용이 행정 운영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인지 등을 살펴 운영하도록 개선안을 제시했는데요.

국민의 목소리가 청와대에 생생히 전달되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그러나 개인적인 일까지 이 게시판을 통해 공론화하려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면서 피로감을 호소하거나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전승엽 기자 김지원 작가 주다빈 최지항

kir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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