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해도 수상' 구멍 난 시스템.. 통합플랫폼으로 손보나 [심층기획-수면 위로 드러난 공모전 폐해]
권익위, 제도 개선 위해 대국민 설문
"기관들, 타 공모전 베껴서 진행 문제
표절 검사 프로그램 개발 필요" 지적
올해 상반기 중 실태조사 결과 발표
정부기관 등 작년 월 600건 개최 불구
공통 운영규정·매뉴얼 없어 논란 지속
심사위원·과정 비공개도 문제점 꼽혀
불채택 작품 아이디어 도용도 풀어야
공공기관 공모전 한곳으로 통합 검토
이번 표절 사태를 계기로 공공기관 공모전 실태조사에 들어갔던 국민권익위원회는 공모전 통합플랫폼 운영 방안 등을 개선안으로 검토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달 25일 시작한 공모전 실태조사 결과는 올 상반기 안에 나올 전망이다.
14일 권익위 관계자는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각급 기관이 10일까지 최근 3년간 공모전 현황 등 관련 자료를 일차적으로 제출했으며 ‘국민생각함’에서도 공모전 개선안 관련 설문조사를 8일까지 진행했다”며 “이달 내로 이를 취합해 분석한 뒤 상반기 중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공모전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커지자 권익위는 지난달 25일 공공기관 공모전 표절, 도용, 중복 응모 등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 개선에 나선다고 밝혔다. 권익위는 중앙행정기관·지방자치단체·교육청이 시행하는 공모전의 실태 조사에 들어간 상태로, 각급 기관의 공모전 개최 현황, 응모작 심사·검증 절차, 표절 등 사유로 수상을 취소한 사례 등을 중점 조사 중이다.
지난 8일까지 권익위가 국민생각함을 통해 진행한 대국민 설문조사에는 1913명이 참여했다. 공모전 통합플랫폼에 대한 지지 의견을 비롯해 보다 투명한 절차와 정보 공개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설문에 참여한 이들은 “심사위원 프로필은 물론 심사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점수가 공개돼야 한다”거나 “제출했던 아이디어가 수상은 못했는데 다르게 활용된 것을 알게 됐다. 후보작 도용이나 기업 재활용 여부 등을 관리감독할 통합플랫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는 공모전 관련 의혹이 있을 때 문제 제기할 창구가 마땅치 않다는 것도 지적됐다. 공모전을 여는 주체인 각 기관보다 상위기관이 이를 검증하고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들의 무분별한 공모전 운영 관행에 대한 지적도 나왔다. 응답자들은 “수많은 기관들이 좀 성과 괜찮다 싶은 곳의 공모전을 베껴 진행하는 관행부터 없애야 한다”며 “공공기관들이 같은 주제로 해마다 공모전을 실시하는 경우가 많고, 과거 수상작을 여러 경로로 확인할 수 있으니 참가자 입장에서 표절 유혹이 크다”고 강조했다.
공모전 사이트 씽굿에 따르면 지난해 열린 공모전은 7338건으로 매달 600여건 수준이었다. 중앙정부기관 주최가 1596건으로 가장 많고, 지방자치단체(1226건), 중소벤처기업(923건), 공기업(600건), 대기업(412건) 등의 순이었다. 사기업보다는 공공기관의 공모전이 압도적으로 많다.
씽굿 측은 “매년 정부 기관 등이 정책 홍보 캠페인 또는 대국민 아이디어 모집 등을 위해 공모전을 활발히 운영하고 있다”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비대면 제안 프로그램의 급증으로 지난해에는 예년 평균(3000∼4000건)보다 훨씬 더 많은 공모전이 열렸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이런 공모전들이 양적 성장에 비해 질적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정부·공공기관은 기관 평가에 ‘제안제도 운영’부문 점수가 반영되는 탓에 경쟁적으로 공모전을 개최하기에 바쁘고, 참여자들은 커리어 개발을 위한 수단으로 공모전 입상에 올인하는 행태가 반복됐다.
취업준비생, 직장인, 공공기관 종사자 등 다양한 공모전 유경험들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현재의 공모전 시스템은 표절이나 저품질 제안을 거르기 힘들고, 국민 의견을 정책에 반영한다는 본질에도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심사과정이나 심사위원 등이 공개되지 않는 불투명성이 참가자들의 의욕을 꺾고 불만을 키우는 요인이 되고 있다. 취업 준비 일환으로 공모전에 자주 도전한다고 밝힌 20대 취준생 A씨는 “누가 심사했는지 비공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결과도 납득하기 힘든 때가 많다”며 “신선하고 다채로운 국민 제안이 줄어들고, 한 번 수상한 사람이 여러 번 중복 수상하거나 부정 수상 사례 등이 늘어나는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표절시비·아이디어 도용 논란 비일비재
현재의 공모전 시스템은 구글링(구글 검색)만 해 봐도 잡을 수 있었던 표절을 여러 번 놓칠 정도로 검증절차가 허술하다. 공통된 제안 운영규정이나 매뉴얼이 없어 각 기관별 역량에 기댈 수밖에 없다 보니 질적인 면에서 천차만별이다. 어이없는 표절작이 최고상을 받는 ‘구멍 공모전’이 생기는 이유다.
공모전 참가자들이 수상작 선정 과정에 의문을 품는 건 비단 표절 사례만이 아니다. 공공기관 제안 담당자들이 대체로 순환보직 공무원이라 전문성이나 관심을 갖기 힘들다 보니 벌어지는 부작용이 크다고 이들은 지적한다.
취미로 직무 관련 공모전에 틈틈이 도전하고 있다는 직장인 B씨는 “실무 부서 1차 심사에서 불채택 판정받은 제안이 버젓이 최종 입상을 하고, 이미 정책 시행 예정이던 아이디어를 약간만 손 봐 제출해 상을 받는 일 등을 목격했다”며 “애초에 현장 직원들이 시행성이 떨어진다고 본 아이디어를 입상시켰으니 정책 개선에 도움이 되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실무 부서에서 불채택했더라도 아이디어 자체가 좋으면 최종 심사에서 입상할 수도 있다”고 밝혔지만, 이럴 경우 정책을 개선한다는 공모전의 취지가 퇴색된다는 지적을 피하기 힘들어 보인다.
반대로 공모전에서 불채택된 제안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책에 반영된 경우도 있었다고 B씨는 전했다. 그는 자신이 2017년과 2019년 행안부 주최 민생규제혁신공모전에 제출했던 아이디어가 당시 입상을 놓쳤음에도, 수개월 후 제안서에 낸 내용 그대로 바뀌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B씨는 “약 3개월 후 관련 지침을 보니 제가 제출한 제안서 문구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적용돼 있었다”며 “아이디어를 가로챘다는 의혹뿐 아니라 제안자의 제안이 정책에 반영될 경우 고지해야 하는 의무 또한 지켜지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B씨의 사례처럼 제안서 일부 내용을 트집 잡아 불채택 처리하고는 아무런 보상 없이 이를 슬쩍 정책에 끼워넣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 심증에 불과해 정식으로 문제 제기하기는 힘들다고 제안자들은 토로한다. 기관에서도 “이미 시행 준비 중이던 것”이라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더 상위기관의 관리감독이나 매뉴얼 없이는 담당자 개인의 도덕성에만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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