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저 콧수염' '현역 육군소장' '불도저'..서울시정 이끈 그들

김양진 2021. 2. 1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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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4·7 보궐선거]부침 많은 자리였지만 '대선 지름길'된 서울시장
1961년 일본 원정경기에서 9전9승을 한 한국 상업은행 여자농구팀이 서울시장실을 찾아와 김상돈 첫 민선 시장(왼쪽)을 만났다. 카이저수염에 국민복을 입고 지팡이까지 휘두르며 ‘부정부패 공무원 일벌백계’를 강조해 공무원들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고 한다. 서울시 서울사진아카이브
지난해 7월 박원순 서울시장이 숨지면서 공석이 된 서울시장을 뽑는 보궐선거(4월7일)가 5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예나 지금이나 이 나라 자원이 집중된 수도 서울은 여론의 바로미터이자 가장 중요한 정치적 승부처 가운데 하나다. 해방 뒤 지금까지 관선과 민선을 통틀어 31명의 서울시장이 명멸했다. 그간 어떤 시장들이 서울을 이끌어 왔는지, 면면을 살펴봤다.
“관존민비(官尊民卑: 관리는 귀하고 백성은 천하다)적이며 독선적인 종래 시정을 혁신하겠다. 왜정 때나 자유당 정권 밑에선 ‘시청은 복마전’이라는 원부(怨府: 뭇사람의 원한이 되는 대상)가 됐지만, 내가 맡은 바엔 깨끗이 숙청을 하고야 말겠다. 난 뭣보다도 시 직원들의 도둑질을 막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한다)”(<동아일보> 1961년 1월6일치 참조)

1960년 4·19 혁명으로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고 같은 해 12월29일 치러진 사상 첫 ‘전국 서울시장 및 시도지사 선거’에서 당선된 반민특위 부위원장 출신의 김상돈 시장은 이듬해 1월5일 취임식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카이저수염에 국민복을 입고 지팡이까지 휘두르며 ‘부패 공무원 일벌백계’를 강조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5개월도 되지 않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현역 군인인 윤태일 육군 소장이 군홧발로 서울시장실을 장악했다. 어렵게 쟁취한 지방자치제가 허망하게 막을 내린 장면이다. 김상돈 시장은 1972년 박정희 군부정권이 3선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에 들어가자, 미국으로 망명해 국제사회에 독재정권의 현실을 고발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다시 시민들이 서울시장을 뽑기까지 길고 긴 시간이 걸렸다. 2기 민선인 조순 서울시장이 당선된 건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1995년이다.

초대 서울시장은 39살 김형민, 미군 중령과 함께 시정 이끌어

지금까지 모두 31명이 서울시장 자리를 거쳐 갔다. 첫 서울시장이자, ‘관선 1기’는 석유상사를 운영하던 김형민(1946년 9월~1948년 12월) 시장으로 1946년 미군정으로부터 임명될 당시 나이는 39살이었다. 역대 유일한 30대 시장이다.

독실한 기독교도에 미국 유학파(웨슬리언대 졸업)라는 점 등으로 미군정에 합격점을 받았다. 하지만 미군 시장 제임스 윌슨 중령과 함께 서울시정을 이끌어야 하는 바람에 실은 허수아비에 가까웠다. 그래도 광복 뒤 여전히 서울 곳곳에 남아 있던 일제 지명은 김형민 시장 때 사라졌다. 본정(本町·혼마치)은 충무로로, 명치정(明治町·메이지마치)은 명동으로 바뀌었다. 경성부를 서울시로 개명한 것도 김 시장 때다. 지금은 서울시란 이름이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는 순한글 지명으로 바꾸는 것에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아직 국내 대학들이 자리잡기 전이어서, 당시엔 김형민 시장처럼 해외 유학파가 많았다. 제2대 윤보선 시장은 영국 에든버러대를, 제3~4대 이기붕 시장은 미국 테이버대를, 제5~6대 김태선 시장은 미국 웨슬리언대를 졸업했다.

반민특위 습격했던 김태선, 3·15 부정선거 주도했던 임흥순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 등을 주도해 ‘자유당의 하수인’이라 불리기도 한 임흥순 서울시장. 서울시 서울사진아카이브

최고 권력자들은 서울시장에 자기 복심을 심으려고 안달복달했다.

김태선(1951년 6월~1956년 7월) 시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행동대장 노릇을 하다 서울시장이 된 인물이다. 경무부 수사국장, 수도경찰청장, 서울시 경찰국장, 내무부 치안국장 등 경찰 요직을 지냈다. 1949년 6월6일 그는 서울시 경찰국장 때 자유당 정권의 ‘눈엣가시’였던 반민특위 특별경찰대를 습격해 해산시키는 일을 주도하기도 했다. 사흘 뒤 이승만 대통령은 <에이피>(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반민특위 습격은 자신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김태선 시장은 4년11개월 동안 서울시장을 지냈다. 관선 시장 가운데 임기가 가장 길었다.

제9대 임흥순(1959년 6월~1960년 4월) 시장도 자유당의 하수인 소리를 들었던 인물이다. 취임 약 10개월 만에 4·19 혁명으로 물러났다. 3·15 부정선거,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등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장면 부통령 암살 시도는 미수에 그치긴 했지만, 자유당 2인자인 이기붕이 임흥순에게, 임흥순이 내무장관 이익흥에게, 이익흥이 치안국장 김종원에게 지시해 이뤄진 것으로 드러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임 시장은 1960년 5월 구속돼, 이듬해 7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군사정권이 그의 형을 면제하고 석방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현역 육군 소장인 윤태일 당시 서울시장이 프렛 스위트 미군 중령에게 감사장을 수여하고 있다. 서울시 서울사진아카이브

군복 입은 서울시장 윤태일, ‘불도저’ 김현옥…군인 시장 전성시대

5·16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엔 현역 군인 또는 군인 출신들이 잇따라 서울시장직에 올랐다. 군 출신 시장은 육군 소장으로 군복을 입은 채 시장 직무를 수행한 제12대 윤태일 시장을 비롯해, 김현옥(제14대), 구자춘(제16대), 박영수(제18대), 박세직(제23대) 등 모두 5명이다.

윤태일(1961년 5월~1963년 12월) 시장 때 서울시는 내무부 산하에서 국무총리 산하로 바뀐다. 윤 시장이 발 벗고 나서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참석자들을 설득해 1962년 ‘서울특별시 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윤 시장의 개인적인 동기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윤 시장은 같은 육군 소장이었지만 나이는 네살 어린 한신 내무부 장관의 지휘를 받는 것이 못마땅했다고 한다.

이 특별조치법은 1991년 폐지됐다. 그렇다고 서울시에 대한 특별대우가 모두 사라지진 않았다. 윤 시장 이후 지금까지 서울시장은 다른 시·도지사와 달리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고 발언권도 지닌다. 윤 시장은 퇴임 뒤에도 군인 신분을 유지하다 1964년 예비역 중장으로 예편했다. 그 뒤 대한주택공사 사장, 국회 건설분과위원장 등을 지냈다.

군 출신으로 1960년대 서울 개발사업을 불도저처럼 밀어부쳤던 김현옥(가운데) 서울시장. 서울시 서울사진아카이브

김현옥(1966년 3월~1970년 4월) 시장은 별명이 ‘불도저’였다.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고,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뒤 부산시장이 됐다. 이후 서울시장이 된 뒤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군사작전을 하듯 신속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해 ‘서울 지도를 바꾼 시장’으로 불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부실공사를 방치했고, 1970년 4월 33명이 목숨을 잃은 마포구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로 시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와우아파트에는 철근 70개를 넣어야 할 기둥에 고작 5개의 철근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김 시장은 1년 뒤 내무부 장관으로 ‘영전’했다. 1995년엔 민선 1기 부산시장에 도전했으나, 문정수·노무현에 이어 3위에 그쳤다.

와우아파트·성수대교 붕괴 등 각종 사건사고…7일짜리 서울시장도

1983년 10월 치안본부장 출신의 제20대 염보현(1983년 10월~1987년 12월) 시장이 취임했다. 지하철 2, 3, 4호선 완공, 한강종합개발 추진, 목동 신시가지 조성 등 건설 분야에 집중했다. 당시 대통령 전두환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4년 넘게 서울시장직을 지켰다. 하지만 1988년 5월 서울시장직에서 물러난 지 5개월 만에 재직 시절 억대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1988년 12월 서울시청 회의실에서 제22대 고건 서울시장 취임식이 열렸다. 서울시 서울사진아카이브

역대 서울시장 가운데 관선 시장과 민선 시장을 모두 거친 사람은 고건(1988년 12월~1990년 12월, 1998년 7월~2002년 6월) 시장이 유일하다. 합치면 재임 기간도 6년에 이른다. 그에게는 ‘행정의 달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데, 화려한 공직 경력이 이 이유를 설명해준다. 1961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37살 때 최연소 도지사(전라남도)를 지냈다. 교통부·농수산부·내무부 장관과 김영삼·노무현 대통령 때 각각 국무총리를 지내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는 국회 탄핵소추안 의결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했다.

제26대 김상철(1993년 2월26일~1993년 3월4일) 시장은 취임 7일 만에 물러났다. 서초구 우면동 개발제한구역 내 농지를 사들여 정원으로 무단으로 사용해 물의를 빚은 데 따른 것이다. 김영삼 정부 초기 46살 젊은 시장으로, 공직 경력도 없어 파격 기용이라고 기대를 모았던 그였다. 2012년 지병으로 숨지기 전엔 보수성향 잡지인 <미래한국>의 발행인을 맡았다.

1994년 10월17일 국회 교통위의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이 지하철 안 환경오염 문제 등을 추궁하자 이원종 서울시장이 한진희 지하철공사 사장에게 답변하도록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후임은 이원종(1993년 3월~1994년 10월) 시장이었다. 행정고시 출신으로 서울시 교통·내무국장을 거쳐 충북도지사를 지낸 서울시 출신 행정 관료다. 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 사고의 책임을 물어 경질됐다. 당시 건설 분야에서 만연돼 있던 부실공사, 부실감리, 안전검사 미흡 등이 집중적으로 폭로됐다. 하지만 이 시장은 이후 민선 충북지사만 두번에 걸쳐 8년간 역임했다. 박근혜 정부 때는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이원종 시장 다음은 우명규(1994년 10월22일~11월2일) 시장이다. 하지만 그가 서울시 기술부시장 때 성수대교 보수관리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11일 만에 낙마했다.

최고령 조순, 최장수 박원순…‘평균’ 서울시장은?

서울시장 취임 기준으로 가장 나이가 많았던 사람은 조순(1995년 7월~1997년 9월) 시장이다. 1995년 7월 민선 1기 서울시장에 취임할 때 67살이었다. 조 시장은 이미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과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터였다.

재임 기간이 가장 길었던 사람은 박원순(2011년 10월~2020년 7월) 시장이다. 박 시장은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무산된 다음 오세훈 시장이 자리를 던진 뒤 치러진 2011년 10월 보궐선거에 당선됐다. 그 뒤 두번 더 당선돼 숨지기 전인 2020년 7월까지 9년 가까이 서울시장을 지냈다. ‘직업이 서울시장’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서울시장 가운데 이명박 시장과 윤보선 시장이 대통령이 됐다. 또 제8대 허정(1957년 12월~1959년 6월) 시장과 고건 시장이 각각 국무총리 및 대통령 권한대행을 역임했다.

평균적인 서울시장은 어떤 모습일까. 나이 53살에 서울대(8명)를 나왔거나 외국 유학(11명)을 다녀온 남자다. 선출직만 보면 취임 당시 나이는 평균 57살이고, 서울시장을 지낸 뒤엔 대통령이 되거나 대선주자 후보 반열에 올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박영선(61) 더불어민주당 예비후보나 나경원(58) 국민의힘 예비후보 등 여성 후보들이 여론조사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두 사람 가운데 한명이 당선된다면 첫 여성 서울시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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