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파일러의 세계] 13명 목숨 앗아간 연쇄살인범, 흔적 조각 연결하니 실체 드러났다
<13·끝> 정남규 연쇄살인 사건
편집자주
범죄 드라마나 영화에서 '초능력자'처럼 등장해 범죄자의 감정선을 무너뜨리는 프로파일러. 그러나 실제 프로파일러는 끊임없이 범죄자 심리나 행동패턴을 분석해 범행의 이유를 찾는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월요일마다 범죄 현장 뒤에서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는 프로파일러의 세계를 조명합니다.
"그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자신의 심정을 이해해주는 듯한 프로파일러 한 마디에 13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20명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희대의 연쇄살인범 정남규가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떨궜다. 체포 이후에도 줄곧 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던 그의 눈엔 눈물이 가득 고였고, 마주한 이에게 마음을 연 듯 자신의 범죄사실을 봇물 터지듯 털어놓았다. 프로파일러라는 이름조차 생소했던 2004년,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 동국대 경찰사법대학원 겸임교수가 선택한 전략이 적중했다.
흔적으로 쫓아간 그 놈
권 교수가 연쇄살인범 정남규의 흔적을 처음 마주한 건 2004년 2월이었다. 서울 서남부지역에서 연달아 발생한 살인 및 살인미수 사건의 연관성을 분석해보라는 임무를 받고서다.
사건 보고서에 담긴 진술들만 들여다보던 시절, 권 교수는 사건 발생 장소에 주목했다. 하나같이 야외에서 발생한 범죄들이라는 데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노상에서 저지르는 범행이 단순히 성공과 실패로 갈리지 않을 것"이라는 직관이 작용했다. 살인·살인미수까지 도달하기까지의 전조현상을 찾는다면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살인사건 관련 보고서는 덮어두고 해당 경찰서 관할에서 발생한 상해나 상해 미수사건까지 파고들었다.
캐비닛 속 사건파일 속에 숨겨져 있던 파편들을 하나씩 모아가자 별개 사건으로 여겨졌던 미제사건들이 하나의 실로 꿰어지기 시작했다. 피해자에 대한 공격 방법이 범인의 족적이 돼줬다. 흔히 야외를 범행 장소로 택한 범죄자들은 어두컴컴한 곳에서 피해자를 공격하거나, 등 뒤에서 공격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정남규가 저지른 범행들은 반대였다. 가로등 아래, 집 앞처럼 환한 곳에서 피해자를 마주한 채 범행을 저질렀다. '강도인 줄 알고 가방을 줬더니, 가방을 보지도 않으며 히죽히죽 웃으며 연거푸 칼로 공격했다'는 것인데, 가까스로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진술이 설명되는 순간이었다.
현장에서 답을 찾아야 했다. 여전히 흐릿하기만 한 범인의 실체를 구체화하기 위해 권 교수는 3개월여간 매일 범행시각에 맞춰 현장을 돌아다녔다. 범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그를 잡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권 교수가 사건 현장 주변 골목을 드나들고 경찰이 검문검색을 강화하자 정남규는 2004년 8월 범행을 끝으로 종적을 감췄다.
잠잠했던 살인사건이 다시 발생하기 시작한 건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2005년 4월이었다. 사건 장소는 야외에서 피해자 집으로, 범행 시각은 모두가 잠든 새벽 시간대로 바뀌어 있었다. 범행 도구도 칼에서 무거운 공구로 달라졌다.
언뜻 앞선 사건들과 연관성이 없어 보였지만, 권 교수는 "분명한 위험 신호"임을 직감했다. 한 방에 상대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도구를 사용하려 한다는 건, 점점 더 큰 자극을 느끼고 싶어한다는 신호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시작된 연쇄살인은 하나같이 아동이나 여성 등 약자가 피해자였고, 이들이 머무는 작은 방이 범행 장소였다. 권위나 권력에 대항하는 성격이 아니라고 추측할 수 있던 대목이었다. 권 교수는 형사들에게 '위협적인 표정·어투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고 질문에 벗어난 엉뚱한 대답을 하는 사람을 유심히 봐야 한다'는 탐문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추적만 2년여, 드디어 마주한 그 놈
그로부터 1년, 권 교수는 2006년 4월 강도상해 미수 사건으로 체포된 남성을 보는 순간 추측 속에서만 존재했던 정남규임을 직감했다. 권 교수는 "경찰서에 도착해 얼굴을 보는 순간 '얘가 맞구나'라는 느낌이 왔다"며 "내가 생각했던 범인 특징과 정확하게 들어 맞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드러나지 않은 범행까지 밝혀내기 위해선 자백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조사실에서 마주한 정남규는 입을 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수년간의 프로파일링 과정에서 정남규와 수많은 가상의 대화를 해왔던 권 교수는 정남규에게 무심한 한 마디를 던졌다.
교도소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생활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잘 알 것 같다.
권일용 프로파일러
권 교수는 "정남규가 어렸을 때 성범죄 피해를 당한 적이 있고 사람을 만나는 걸 싫어하는 성격인데, 이런 사람이 성추행 등으로 강력범들과 한 방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게 힘들었을 것 같아 이런 말을 던졌다"면서 "한참을 생각하더니 모든 범죄를 말하겠다고 나왔다"고 회상했다.
조사실을 나온 권 교수는 정남규 캐릭터에 적합한 수사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내 말을 들어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게끔 할 것, 권위와 권력에 위축되는 정남규 특성을 고려해 조사시엔 한 명만 들어가 정남규를 마주할 것 등이었다. 정남규가 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걸 물어서 대답을 이끌어냈다. 범죄자 특성을 파악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말하게 하는 것, 권 교수가 현장에서 터득한 프로파일링 노하우였다.
그 놈은 왜 십수 명을 죽였을까
프로파일링은 자백뿐 아니라 범행 동기를 파악하는 데도 유용하게 작용했다. 정남규는 철저하게 사회로부터 고립된 섬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사회 구성원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타인과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의미를 찾지 못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지 못해온 과거의 기억들 탓이었다.
정남규는 어린 시절 여러 차례 성범죄·폭행 피해를 입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나는 등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있단 생각에 빠져있었다. 이런 생각은 상대적 박탈감을 넘어 사회적 배제감으로 발전했다. 권 교수는 "사회적 배제감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참여할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느끼는 상태"이라며 "이에 따라 사회와 단절됐단 생각만 남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의 판결문에도 이 같은 내용이 포함돼있다.
사회와 철저히 담을 쌓은 정남규는 서서히 괴물이 돼갔다. 어차피 자신과 상관 없는 사람들이니 화가 나거나 감정이 격해져 해를 입혀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구성원들이 지키는 규범과 질서 따위를 지킬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단순히 타인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 성향이나, 여러 성격장애만이 그를 악인으로 만든 게 아니었다.
2004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범행을 시작해 2006년 4월까지 체포될 때까지 중간중간 수개월씩 살인을 쉴 때도 있었지만, 이는 연쇄살인범들에게 흔히 드러나는 심리적 냉각기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사람들이 그의 마수를 피해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늦은 외출을 꺼리게 되면서 적합한 피해자를 찾기 어려웠을 뿐이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시기에 정남규는 범행 현장을 찾기도 했다. 수사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차오르는 욕구를 다스리기 위해 현장을 찾아 살인의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서였다.
대법원은 2007년 4월, 13명을 살해한 혐의(강도살인) 등으로 기소된 정남규에 대해 사형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하지만 정씨는 사형 선고가 내려진 지 2년 뒤인 2009년 정남규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마지막 '연쇄살인'을 저질렀다.
오지혜 기자 5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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