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찾아 떠나는 돈키호테의 여정.. "운명이여 내가 간다"

박성준 2021. 2. 15.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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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맨오브라만차'
美 CBS방송국 드라마로 처음 제작돼
내용 좋아 연극 거쳐 뮤지컬로 진화
대사 차지하는 비중 커.. 연극과 유사
세르반테스·돈키호테 등 등장인물들
퇴장 장치 없이 극에 녹여 흐름 살려
'류정한·조승우·홍광호' 라인업 주목
“들어라, 썩을 대로 썩은 세상아. 죄악으로 가득하구나. 나 여기 깃발 높이고 일어나서 결투를 청하는 도다. 나는 나. 돈키호테, 라만차의 기사. 운명이여 내가 간다.” 뮤지컬 ‘맨오브라만차’의 아홉번째 공연이 시작됐다. 천 번을 싸워 천 번을 진다 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겠다는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의 모험 이야기다. “(돈키호테)공연을 보고 배우가 될 결심을 했다”는 조승우(왼쪽)와 ‘레이디 둘시네아’ 알돈자 역을 맡은 김지현. 오디컴퍼니 제공
뮤지컬 ‘맨오브라만차’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달빛 아래 ‘돈키호테’와 ‘레이디 둘시네아’의 대화다. 둘시네아는 실은 여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밑바닥 인생을 사는 알돈자. 돈키호테 역시 세상 꼬락서니를 한탄한 끝에 자신을 기사로 착각하게 된 시골 노인 알론조다. 갑자기 자신 앞에 나타나 ‘귀부인’ 운운하는 돈키호테에게 알돈자는 따져 묻는다. “원하는 게 뭐냐. 이 세상은 똥구덩이고 우리는 거기서 꿈틀대는 구더기야.” 돈키호테는 답한다.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그대를 구하는 일이오…이기고 짐은 중요하지 않소. 오직 나에게 주어진 길을 따를 뿐. 그것은 진정한 기사의 임무이자, 본분 아니, 특권이요.”

순수한 열정은 한순간이나마 마법을 부린다. 괴상한 행색의 반미치광이 노인은 기사도를 지닌 사나이가 되고, 이에 감응한 여관 작부(酌婦)는 귀부인으로 거듭난다. 비로소 레이디 앞에 선 기사가 된 돈키호테는 명곡 ‘이룰 수 없는 꿈(The Impossible Dream)’을 부른다. 선율도 좋고 가사도 좋아 숱한 가수, 성악가가 불렀던 노래. 세상에 나온 지 반백 년 넘은 뮤지컬이 여전히 사랑받을 수 있도록 만드는 ‘맨오브라만차’의 생명력이다.

뮤지컬 ‘맨오브라만차’를 관람하는 경험은 잘 차려입은 운전사가 모는 클래식 카에 올라탄 느낌과 비슷하다. 좌석에 앉아 편안히 음악과 연기를 즐기면 좋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좋은 향기처럼 피어난다. 국어 시간에 배웠던 노스탤지어(鄕愁)를 떠올릴 수도 있고, 낭만에 대하여 생각해보기도 한다. 1965년 11월 22일 미국 뉴욕 초연작. 참혹한 베트남전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시절이지만 비틀스가 한창 새 노래를 만들어내고, 평화·인권 운동이 시대정신이자 문화 흐름으로 피어나던 때에 태어난 작품이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야 한둘이 아닐테지만 ‘맨오브라만차’는 원래 미국 CBS방송국 드라마로 처음 만들어진 작품이다. 내용이 좋아 연극을 거쳐 뮤지컬로 진화했다. 그만큼 대사가 차지하는 비중도 크고 여러모로 연극에 가까운 뮤지컬이다.

무대는 스페인 한 지하감옥에 새로운 죄수 둘이 돌계단을 내려오면서 시작된다. 주인공인 세무관리 세르반테스와 그의 시종이다. 신성한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려다 잡혀들어왔다. 거친 죄수들 텃세에 세르반테스는 자신이 쓴 소설로 자신의 인생을 변론하겠다며 죄수들이 배우인 즉흥극판을 벌인다. 죄수들을 출연시키는 배역 선정이 끝난 후 세르반테스가 수염을 붙이고 엉성한 갑옷을 입으면서 이야기는 비로소 라만차에 살고 있는 늙은 신사 알론조가 자신을 ‘돈키호테’라는 기사로 철석같이 믿고 벌이는 소동으로 이어진다.

극 흐름은 완만하다. 기사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돌진하거나, 이발사의 놋쇠대야를 황금투구로 믿고 머리에 쓴 채 마을 불량배들과 싸우는 정도가 큰 사건이다. ‘기사도’라는 이상(理想)을 향한 돈키호테의 답 없는 동경은 결국 그를 힘없는 늙은이로 돌려놓으려는 조카사위의 거울 치료 요법으로 깨진다.

지하감옥에서 세르반테스가 펼쳐 보인 자신의 원고도 여기까지만 적혀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르반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도 있는 종교재판이 코앞으로 다가온다. 이상이 현실의 견고한 벽에 부닥치는 순간이다. 세르반테스는 원고를 끝맺기는커녕, 자신의 운명이 어찌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크게 낙심한다. 하지만 세르반테스가 펼쳐보인 돈키호테의 열정과 이상에 마음을 뺏긴 죄수들은 그를 격려한다. 용기를 얻은 세르반테스는 ‘이룰 수 없는 꿈’이 다시 한 번 나오는 결말을 죄수들에게 선사하며 어깨를 펴고 객석에 등을 보인 채 종교재판장으로 향한다.

이처럼 ‘맨오브라만차’는 다른 어느 뮤지컬보다 주인공 돈키호테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젊은 세르반테스와 늙은 돈키호테, 그리고 알론조를 등·퇴장이나 별다른 장치 없이 무대 위에 만들어내고 그 사이를 계속 오가야 한다. 그만큼 연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시골 늙은이가 어느 순간 진정한 기사로 빛나고, 다시 꿈과 삶의 의지를 잃은 노인으로 돌아오나 죽음을 앞두고 반짝 다시 빛나며 기사로 죽는다. 그런 만큼 제작사는 ‘류정한·조승우·홍광호’라는, 뮤지컬계 최고 인기를 누리면서 이미 여러 차례 돈키호테로 활약한 남자 배우들로 라인업을 구성했다. 탁월한 가창력과 관록의 류정한, 가장 많은 팬을 거느린 ‘돈키호테’인 조승우, 그리고 폭발적 가창력과 익살스러운 연기력이 매력인 홍광호. 서울 샤롯데 씨어터에서 3월 1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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