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에 패소한 SK배터리, 배상 합의못하면 215조 시장 잃을수도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지난 10일(현지 시각)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 간의 ‘전기차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LG 측의 손을 들어줬다. 최종 판결의 골자는 SK 측의 영업비밀 침해를 인정하고 앞으로 10년간 미국 내 배터리 수입·생산을 전면 금지한다는 것이다.
ITC는 이날 판결문에서 “SK이노베이션이 생산하는 리튬 이온 배터리 완제품과 셀·모듈·팩 등 배터리 부품에 대해 미국으로의 수입, 미국 내에서의 판매 및 영업 활동을 향후 10년간 전면 금지한다”고 밝혔다. ITC는 자유무역지대 등 제3자를 통한 수입 및 판매 역시 금지했다. 이미 수입된 제품은 팔 수 없고, 앞으로의 생산·수입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ITC는 이미 SK이노베이션으로부터 배터리를 납품받아 미국 내에서 전기차를 만들 계획인 폴크스바겐과 포드에 한해 납품 차질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각각 2년, 4년의 유예기간을 뒀다.
미국 내 전기차 공장을 갖고 있는 폴크스바겐은 내년부터 SK 배터리를 납품받아 연간 20만 대 분량의 전기차를 생산할 계획이었다. 포드도 현재 개발 중인 픽업트럭 F-150 모델의 전기차 버전에 SK 배터리를 탑재할 예정이었다. 이들은 유예기간 이후엔 SK 배터리 대신 다른 업체의 배터리를 탑재해야 한다.
ITC는 또 SK 배터리를 탑재한 상태로 이미 미국 내에 판매된 기아의 전기차종(쏘울EV·니로EV 등)의 경우, 배터리 교체·수리가 필요할 경우에만 배터리 공급을 허용했다. SK는 매년 연말 폴크스바겐·포드·기아 등에 공급되는 배터리의 물량·액수를 ITC에 보고해야 한다.
이번 소송은 국내 대기업이 미국에서 벌인 사상 첫 대형 소송전이었다. 특히 미래 신사업인 전기차 시장과 관련돼 있어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그동안 국내 대기업 간에 소송이 불거지면, 국내 법원에서 다투거나 최고 경영진 차원에서 합의로 해결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두 회사는 어떻게 하다 미국에서까지 소송을 벌였을까? 그 과정과 향후 전망을 5가지 질문으로 풀어봤다.
Q1. 어쩌다 법정까지 갔나
전기차 배터리 선두 달리던 LG, SK로 인재들 대거 이직하자 소송
LG와 SK의 ‘배터리 전쟁’ 발단은 2017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0년대 들어 전기차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배터리 업체들의 배터리 수주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국내에선 LG화학이 2010년 미국에 배터리 공장을 착공하는 등 가장 앞서 있었다. SK이노베이션은 2017년 “2025년까지 배터리에서 글로벌 선두가 되겠다”며 추격을 선언했다.
2017년 여름 LG화학에서 배터리 관련 연구·개발(R&D) 등을 담당하던 직원 20여 명이 SK이노베이션으로 대거 옮겼다. 당시 LG는 SK 측에 “인력 스카우트를 자제해 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이직이 계속되자 LG는 SK로 간 핵심 인력 5명에 대해 법원에 전직(轉職) 금지 가처분 소송까지 냈다. LG는 이들이 이직 과정에서 기술 관련 핵심 문서들을 유출해갔다고 의심했다. 당시 SK 측은 LG 경력사원 100여 명을 채용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이들이 높은 연봉과 좋은 처우 때문에 자발적으로 옮긴 것일 뿐”이라며 기술 유출을 부인했다.
Q2. LG, 왜 ITC에 제소했나
ITC 소송땐 증거서류 의무 제출, 기술유출 확인 쉽고 판결도 빨라
LG는 2019년 4월 전기차용 배터리와 관련해 SK를 상대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와 델라웨어법원에 영업 비밀 침해 혐의로 소송을 제기했다. 델라웨어는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자회사가 있는 곳이다. LG는 왜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소송을 하기로 결정했을까?
ITC는 대통령 직속 준(準)사법기관으로 특허 침해 같은 불공정 무역 행위에 대해 수입 금지 조치 등을 내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ITC는 산업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조사 시작부터 결정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다는 특징이 있다. 일반적으로 미국 법원에선 1심 판결까지 3년 정도 걸리지만, ITC는 16개월 이내 결정이 나온다. 또 미국 소송법에는 흔히 ‘디스커버리(discovery)’라 불리는 ‘증거 개시(開示)’ 제도가 있다. 재판 시작 전 양측이 증거 서류를 모두 공개하는 것이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패소하게 돼 있다. LG는 이 제도를 활용하면 SK가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기밀 서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한국에도 이 같은 제도가 있는데, 매우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Q3. LG 손들어준 이유
ITC “SK가 증거 삭제했다” 판단, 미국 내 수입·생산 10년간 금지
LG가 이번 소송에서 승리한 이유는 SK가 증거 개시 명령을 따르지 않고, 관련 증거를 삭제했다고 ITC가 판단했기 때문이다. LG는 증거 개시 과정에서 SK 측이 회사 중간 간부급에게 LG화학 관련 문서를 삭제하라는 메일을 발송한 사실을 발견했다. ITC는 LG의 주장을 받아들여 SK에 자료를 복구하라는 ‘포렌식 명령’을 내렸지만, SK 측이 이를 성실히 따르지 않았다. 결국 ITC는 증거 훼손과 법정 모독 등의 혐의로 작년 2월 SK에 대해 조기 패소 예비 결정을 내렸고, 이번에 최종 확정했다.
ITC는 앞으로 10년간 SK 배터리의 미국 내 생산·수입 금지를 결정했다. ITC는 이번 판결을 내리면서 자동차 업체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포드에는 4년, 폴크스바겐에는 2년간 SK에서 납품받을 수 있게 했다. 이 같은 유예 기간은 자동차 업체들이 다른 배터리 납품 업체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해 준 것이라는 해석이다. 자동차 회사들도 곤혹스럽다. 폴크스바겐은 “의도하지 않은 피해자가 됐다”며 유예 기간을 4년으로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Q4. 바이든, 거부권 행사?
판결 60일내 거부권 가능하지만 영업비밀 침해 뒤집힌 적은 없어
SK가 마지막으로 기대하는 것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다. 대통령은 ITC의 결정이 공공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판단할 경우, 판결 60일 이내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SK는 미 조지아에 총 3조원을 투자해 배터리 공장 2개를 짓고 있고, 여기서만 일자리 약 6000개가 생겨날 예정이다. 이 때문에 브라이언 켐프 조지아주지사는 지난 13일 바이든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 전기차 공급이 부족해져 바이든 대통령의 친환경 정책이 차질을 빚을 것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은 낮다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바이든은 중국을 압박하면서 ‘지식재산권 침해’와 ‘기술 이전 강요’ 등을 문제로 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SK의 영업 비밀 침해를 옹호하는 듯한 입장을 취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2010년 이후 ITC에서 진행된 600여 건의 소송 중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경우가 단 1건에 불과하며 영업 비밀 침해와 관련해서는 전무하다.
Q5. 어느 선에서 합의할까
LG, 합의금 3조원 안팎 요구… SK는 계열사 지분 제공 검토
두 회사가 궁극적으로는 합의에 도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시간은 SK의 편이 아니다. LG와 합의 외에 다른 대안이 사실상 없다. 대통령 거부권 행사 시한인 60일간의 시간이 주어진 셈이다.
SK는 충남 서산과 미국 조지아 등에 공장을 지으면서 6조원 이상을 투자했다. 미국에서의 수입·생산이 금지된다면, 유럽·중국 등에서의 사업도 불가능하다. 미국 사업이 막힌 상태에서 SK를 배터리 공급처로 선택할 자동차 회사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SK 입장에선 2030년까지 약 215조원으로 성장할 자동차 배터리 시장을 포기하기도 어렵다.
문제는 합의금이다. LG는 그동안 SK 측에 3조원 안팎의 보상금을 요구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ITC 판결이 나온 이상, 이 금액을 올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SK는 이에 대해 “금액보다 LG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SK이노베이션이 가진 유동자산은 대략 1조8000억원 정도다. 이 때문에 SK의 배터리 소재 관련 계열사의 지분을 LG 측에 제공하는 방법 등이 거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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