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이 양모' 신상공개 불발..여성 범죄자는 왜 안 될까[팩트체크]
'정인이 양모(養母)'에 대한 신상공개를 요구하는 여론이 있었지만 끝내 공개되지 않았다.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선 정인이 양부모에 대해 신상공개를 해달라는 내용의 청원이 이어졌다.
이미 정인이 양모는 재판에 넘겨져 수사기관에 의한 신상공개는 불가능해졌다.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선 쉽게 정인이 양부모의 실명과 직장정보 등을 볼 수 있지만, 국가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신상을 공개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정인이 양모'사건을 계기로 '여성범죄자'에 대해선 신상공개가 안 되고 있다는 문제제기도 SNS와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나오고 있다. 신상공개에 관한 결정권을 가진 경찰·검찰 등 수사기관이 '남성범죄자'에 대해서만 신상을 공개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2009년 강호순 연쇄살인사건 여파로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이 개정돼 2010년부터 강력범죄 피의자의 얼굴 공개 기준이 세워졌다. 이 법에선 '성폭력·살인·강간·강도' 등 특정 강력범죄 피의자에 대해 얼굴 공개가 허용되도록 하고 있다.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에 따른 신상공개 기준은 △범행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강력범죄 사건 △충분한 증거가 있을 것 △국민의 알권리 보장 △피의자가 청소년에 해당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 법을 근거로 신상공개된 범죄자 중 여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일한 예가 '고유정'이다.
고유정 외엔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에 근거해 신상공개가 된 범죄자(공개 당시엔 피의자)들은 모두 남자였다.
2017년 창원 골프장 주부 납치살해사건에서 주범 심천우의 범행을 도왔던 '여성' 공범 강정임도 구속된 뒤 경찰에 의해 공식적으로 신상공개가 됐다. 하지만 이미 공개수배를 통해 언론에 얼굴과 이름이 널리 공개된 뒤라 사실상 의미없는 형식적인 신상공개였다.
따라서 고유정이 유일한 신상공개 대상이 된 강력범죄를 저지른 여성 피의자로 볼 수 있다.
게다가 고유정의 얼굴공개 과정도 얼굴이 적나라하게 공개됐던 다른 남성 피의자들과는 달랐다. 경기 김포에서 긴급체포 돼 제주에서 구속이후 기소와 재판과정을 모두 거치는 동안에도 고유정 얼굴 사진은 제대로 찍힌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고유정이 제주 동부경찰서 유치장에서 조사실로 이동 중에 촬영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찍힌 동영상 캡쳐본이 '유일한' 고유정의 얼굴 사진으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해당 사진도 찍힌 과정이 석연치 않다. 경찰이 신상공개 결정 뒤, 고유정이 해당 결정에 대한 집행정지까지 신청하면서 얼굴공개를 이틀간 거부했다. 그로 인해 여론이 악화되자 초동수사 실패로 이미 비난을 받던 경찰이 경찰서 내부를 이동중인 고유정을 몰래 찍다시피 한 급조한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고유정은 그 이후엔 제주지검으로 이동하던 때나 기소이후 제주구치소와 제주법원 법정을 드나들 때 항상 머리를 풀러 얼굴을 전부 가려 얼굴 공개를 피할 수 있었다.
같은 '미성년자'인데 인천 초등생 토막살인 김양과 박양은 '신상보호', '부따' 강훈 '얼굴공개'
여성 피의자에 대한 신상공개 요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론 2017년 3월 인천에서 초등학생을 살해하고 시신을 토막내 훼손한 뒤 유기한 주범 김모양(당시 만 17세)과 공범 박모양(당시 만 18세)에 대해 신상공개를 해야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이들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신상공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인천 초등학생 살해사건과는 대조적으로 ‘박사방’ 운영에 가담한 공범 ‘부따’ 강훈에 대해선 사건당시 기준으로 만18세 미성년자임에도 경찰이 무리하게 신상을 공개한 바 있다.
강훈에 대해선 당시 법조인, 대학교수 등 외부위원 4명과 경찰관 3명으로 구성된 심의위원회는 “미성년자인 피의자(강훈)가 신상공개로 입게 될 인권침해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했으나, 국민의 알 권리, 동종범죄의 재범방지 및 범죄예방 차원에서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므로 피의자의 성명, 나이, 얼굴을 공개하기로 심의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만 18세로 성폭력특례법에 의해선 신상공개를 할 수 없었던 강훈에 대해 '만 19세가 되는 해의 1월1일을 맞이한 사람은 청소년에서 제외한다'는 '청소년보호법'의 예외 규정까지 끌어왔다.
하지만 강훈에 대한 이런 결정에 대해 '원칙 없는 포퓰리즘성 신상공개'란 비판이 있었다. '박사방' 사건이 아니었다면 과연 강훈 나이의 미성년자를 신상공개했겠느냐는 것이다. 경찰이 적용한 청소년보호법 예외규정도 원래 취지는 미성년자에게 취업 등에서 성년과 같은 혜택을 주기 위해 만든 것으로 청소년에게 유리하게 적용하기 위한 예외규정이다. 이 예외규정을 형사적 제재로 하는 신상공개에 갖다 붙인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박사방 피의자들을 엄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여론에 밀려 경찰의 원칙없는 신상공개는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못했다.
신상공개는 사실상 '경찰 재량'…'여성 범죄자' 얼굴공개 꺼린다는 오해 스스로 만들어
법에 따른 피의자 신상공개는 '강행규정'조항이 아니다. "얼굴 공개 등을 할 수 있다"고 돼 있어 '임의규정'으로 본다. 수사기관 재량에 따라 신상공개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수사기관은 신상공개심의위원회를 열어 사건마다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 점은 그간 신상공개를 둘러싼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강력 범죄의 유형과 비난가능성에 대한 '정량적' 판단이 아니라 경찰이나 검찰의 입장이나 여론 등 '정성적' 고려가 들어갈 수 밖에 없다.
때에 따라서 초기 수사가 잘못돼 경찰에 대한 비난가능성이 높은 경우에 시선을 돌리기 위해 성급하게 피의자 신상공개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형사사건을 전문으로 하는 한 변호사는 "강력 사건으로 언론에 보도되는 범죄자 중 다수가 남성이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신상공개가 된 것은 이해가 가는 면이 있다"면서도 "그런데 여성 범죄자에 의한 강력사건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닌데 이제까지 고유정 외엔 신상공개가 안 됐단 점은 수사기관이 여성 범죄자의 얼굴 공개 등에 대해선 남성보다 더 민감하게 여기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만한 문제"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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