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안창홍, 디지털 펜화로 현대의 삶을 리터치하다
[김윤섭 박사의 바로 이 작가] 안창홍
텅 비었다. 뱀이 허물을 벗듯, 화려한 외피만 남겼다. 욕망의 흔적이다. 남겨진 옷과 신발엔 아직도 주인의 뜨끈한 체온이 남았다. 안창홍의 신작 <유령패션>은 여느 그림이 아니다. 새로운 형식의 디지털 펜화다.
안창홍의 디지털 펜화 <유령패션(Haunting Loneliness)> 시리즈는 ‘비움의 미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워짐의 허망함’을 고발한 것이다. 그림 속엔 투명 모델이 홀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무리 멋스럽게 포즈를 취한들 정작 주인공은 보이질 않으니 허탈하기 그지없다. 제각각의 개성을 지닌 패션은 우리 현대인의 얼굴이다. 이 옷의 주인공들은 과연 어떤 신념으로 삶을 불태우고 있었을까. 열병처럼 뜨거웠던 그 집념의 열정을 과연 되살릴 수는 있을 것인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는다.
“좋은 작품이란 쉽지만 깊다. 무한대의 깊이와 무게가 있어야 한다. 예술이라는 것은 먼 훗날 그 작가의 작품을 보고, 그 작품을 통해서 그 시대를 유추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작품 속에 시대정신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가라는 직업을 빙자해서 ‘삶을 생활로써만 영위하기 위한 그런 삶’들이 비일비재하다. 난 그런 삶도 인정하지만, 내 삶 속에는 그런 삶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겠다.”
안창홍 작가는 스스로 천명한 것처럼 ‘작가주의적 삶’의 방식을 고수한다. 경기도 양평 끝자락에 작업실의 터를 잡은 지가 30년이 넘었다. 1989년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살았던 8개월 정도를 제외하면 양평 작업실의 삶이 전부나 마찬가지다. 처음엔 인적 드문 오지(奧地)였다. 마치 숲을 보고 싶어서 그 숲을 떠난 것처럼 스스로를 오지에 유배시키고서야 자신이 살아왔던 인간사를 바로 볼 수 있었다. 줄곧 수행자처럼 인간의 삶에 대해 치열하게 파고들었다. 관찰자적 시점을 넘어선 실천적 삶의 방식이 안창홍 스타일이다.
늘 화두는 욕망이다. 어쩌면 욕망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결핍을 채우고 회복하려는 심리를 가졌다. 그 욕망은 욕구를 넘어서 결과에 집착하게 만든다. 하지만 안 작가의 욕망은 그런 집착만을 말하지 않는다. 최근의 디지털 펜화 <유령패션> 시리즈 영문 표기를 ‘Haunting Loneliness’로 했다. 대략 사전적 해석은 ‘(아름답거나 슬프거나 무서워서) 잊을 수 없는 고독 혹은 외로움’ 정도다. 입거나 걸친 것들이 아니라 그 모델의 심리 상태에 주목한 것이다. 안 작가가 그린 욕망엔 지나친 허욕(虛慾)을 경계하는 중용(中庸)의 도가 담겼다. 한편으론 시대의 아픔을 깨닫게 하는 자각몽(自覺夢)이다.
“빛과 그늘의 틈, 욕망과 절제의 틈, 물질과 정신의 틈, 선과 악의 틈, 이곳과 저곳의 틈, 이 세상의 모든 상반된 가치의 경계. 예술은 규범과 단정의 부산물이 아니라 모호함과 불안함과 갈등의 긴장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라야 더욱 아름답다.”
2019년 경남도립미술관 개인전 ‘안창홍: 이름도 없는/기록을 기억하다’의 벽면에 적혔던 작가노트의 내용이다. 이 전시에선 권력자의 역사에 가려지고 잊힌 소외된 ‘평범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선보였다. 단지 이름만 없는 이들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묻혀 버린 익명의 인물들을 ‘두 눈을 가린 얼굴’로 상징화했다.
눈을 가린 초상은 우리 민족의 애환을 에둘러 표현했던 2012년 <아리랑> 시리즈부터 시작됐다. 당시 개인전에선 “인물들이 눈을 감고 있으면 관객들은 그 너머 내면을 보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눈을 가리거나 빈 동공의 표현법은 최근의 신작 <유령패션> 시리즈와도 통한다. 대량 소비사회의 빛과 그늘, 도시의 공동현상(空洞現象)과 공허함, 그 속에서 유령처럼 떠도는 우리들의 모습, 화려함 뒤에 가려진 폭력과 야만성, 넘쳐나는 물질과 증발해 버린 정신성, 껍데기만 떠도는 유령의 도시…. 안 작가의 <유령패션>은 결핍과 잃어버림에 대한 진혼서시(鎭魂序詩)를 대신한다.
안 작가의 가장 큰 매력 중에 ‘쉼 없는 창작자로서의 자기계발’을 빼놓을 수 없다. 평소 “안 그래도 짧은 인생인데, 하고 싶은 거 하다가 죽어야지”라는 말을 달고 산다. 미술계에선 ‘자유로운 몸’의 대변자로 통한다. 제도권 교육까지 내팽개치고, 보수적인 틀을 과감하게 벗어 던진 독립된 삶의 성공 모델이다. 페인팅, 콜라주, 사진, 색연필화, 입체 테라코타, 부조, 채색 조각…. 우리나라 미술가 중에 안 작가만큼 다양한 장르를 확장한 사례는 없다. 디지털 펜화도 그 연장선상이다. 사진 이미지에 스마트폰 펜으로 리터치해서 완성한다. 그래도 원화(原畵)의 질감 못지않다. 그의 작품엔 ‘육즙이 흘러넘치는 날것 그대로의 식감’이 살아 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미다스의 손을 가졌다.
디지털 펜화를 그릴 수 있는 기기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안 작가는 굳이 스마트폰을 고집한다. 최신식 스마트폰은 통신 이외에도 다양하고 편리한 기능들의 애플리케이션이 탑재돼 있다. 손안의 작은 화면이지만, 스마트폰의 디지털펜 한 자루면 어디서든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원하는 대로 손쉽게 그릴 수 있다. 그려진 디지털원화를 시차에 상관없이 주고받을 수도 있다. 또한 작은 화면 속에서 그리다 보면 다소 거친 터치들이 남을 수 있다. 안 작가는 이걸 ‘디지털화(畵)의 손맛’이라 여긴다. 그때그때의 작가적 감성과 감정이 묻어나는 촉감적인 시각효과인 셈이다.
디지털 펜화의 제작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다. 안 작가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은 ‘갤럭시 노트20 울트라 5G’다. 먼저 그림의 밑바탕이 될 사진 이미지는 인터넷상에 떠도는 풍부한 자료들 중에 수집한 것이다. 선별된 사진 위에 스마트폰 앱을 통해 그리기 방식을 선택한 후 차용한 사진을 지우고 덧붙여 그리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완성해 나간다. 그러다 보면 1차적인 사진도상의 이미지나 느낌은 전혀 다른 감성의 디지털화로 재탄생한다.
이전의 작품들과 새롭게 선보인 디지털화를 연결 짓는 요소는 오랫동안 지속해 온 ‘자본과 성(性)과 권력의 함수관계’에 대한 주제의식이다. 인간의 폭력성과 욕망에 대한 연구는 ‘안창홍 스타일 작품’을 지탱하는 뿌리나 마찬가지다. 이야기의 배경은 어김없이 현대 도시의 삶이다. 그 안에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 담긴 현대성과 감각적인 패션 스타일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작가만의 메시지를 담아낸 것이 참으로 매력적이다.
안창홍의 작가 여정엔 늘 논란의 시비가 뒤따랐다. 새로운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어김없이 충격적인 자극을 선사했다. 그렇다고 사회적 규범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길을 여는 가이드 역할이었다. 처음엔 다소 헛갈리고 혼란스럽지만, 지나고 보면 안창홍의 제언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전엔 작품의 내용과 표현 범위가 이슈였다면, 이번 디지털 펜화는 표현 재료와 방식에 대한 생각거리를 내줬다. 디지털 시대에 창작 행위와 이미지 활용의 범주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이기도 하다.
안 작가의 디지털 펜화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관람객을 만난다. 우선 작품 이미지가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 주거나, 원하는 작품 이미지를 골라서 소장할 수 있는 디지털 액자 방식이다. 선택한 디지털 액자 겉면엔 안 작가의 드로잉이 그려진다. 다음은 완성된 이미지를 디지털 프린트한 에디션 작품이다. 주로 30호(90.0×72.7cm) 크기는 에디션 수량 20장, 40호(100×80.3cm) 크기는 에디션 수량 5장으로 이뤄진다. 참고로 30호 크기의 전시 가격은 400만 원 선이다.
김윤섭 소장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19 안양국제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정부미술은행 운영위원, 인천국제공항 문화예술자문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숙명여대 겸임교수, 2020 경주국제레지던시아트페스타 전시감독, 아이프(AIF) 아트매니지먼트 대표,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서울시 미래유산보존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김윤섭 아이프 아트매니지먼트 대표·미술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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