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더P] 이광재, 10년 야인 거쳐 부활한 노무현의 그림자
유년시절 어머니는 방앗간을 운영했고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이른 아침 할아버지가 농삿일을 나갔다가 돌아오기 전까지 마당을 쓸어놓지 않으면 혼이 났다고 한다. 할머니는 늘 "밥을 배부르게 먹으면 게을러진다"고 강조했는데 이 의원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영향으로 부지런한 생활 습관을 기른 것 같다고 돌이켰다.
초등학교 시절은 모범생과 거리가 멀었다. 평창국민학교 2학년 겨울이었다. 당시엔 석탄 난로를 사용했는데 큰 석탄을 잘게 깨서 난로에 집어넣어야했다. 한 친구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육성회비를 내지 못했는데 선생님이 그 아이의 아버지를 불러서 석탄 깨는 일을 시켰다고 한다.
이 의원은 어린 나이였지만 마음 속으로 "시키려면 학교가 다 끝난 다음에나 시키지"라며 담임선생님을 야속하게 생각했다. 반항심 어린 마음에 숙제를 안하기 시작했고 체벌을 겪어야 했다고 했다. 이후에도 몇가지 일화를 겪은 이 의원은 국민학생때부터 "왜 누구는 부자로 살고 누구는 가난하게 살까"라는 질문을 품게 됐다고 했다.
이후 자연스레 재야운동가들의 영향을 받고 자라게 된다. 1980년엔 원주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그리고 그해 5월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벌어진다. 소식을 접한 이 전 의원은 광주로 내려갈 지 고민에 빠졌지만 7남매의 장남이라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 내내 부채의식을 가졌다.
고3 마지막 시험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기 전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광주에 들러 전남대, 조선대, 5·18 민주묘지 등을 둘러봤는데 이 의원은 "우울한 마음과 두려움이 들었다"고 했다.
1983년 연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한다. 졸업은 법학과로 하지만 당시엔 인문계 학과를 다니면 학생운동으로 빠지게 될까 봐 이공계로 입학했다고 한다. 다짐은 얼마 못갔다. 학생운동 연합기관지인 '백만학도'의 편집장을 맡았다. 이 의원은 군입대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자르기도 했다. 2005년 병역기피 논란이 불거졌을 때 이 의원은 "(학생운동을 하면) 군에 가는 즉시 보안사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할 것이고, 고문을 못 이겨 동지의 이름을 불게 되면 동지들이 잡힐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1986년 수배를 피해 충남 천안에서 노동일을 했다. 이내 부산으로 내려가 주물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그때 처음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났다. 1987년 부산 재야 인사들이 모여 강연회를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당시 인권변호사 활동을 하던 노 전 대통령과 스치듯 인사를 나눈게 첫 만남이었다.
노 전 대통령과 본격적인 인연도 1988년 시작된다. 노 전 대통령은 그 해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부산동 지역 국회의원에 당선되는데 부산 지역 재야운동가였던 임정남 씨에게 보좌진 추천을 부탁한다. 임 씨는 자신의 후배를 추천했으나 후배는 이를 거절해 이 의원을 보좌진으로 추천했다. 이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을 만나 '면접'을 본다.
두 시간 가까이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노 전 대통령은 이 의원에게 "왜 학생운동을 했냐" "양김(김대중·김영삼)의 분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재야운동계과 새롭게 출범하는 국회는 어떤 관계가 될 것 같냐"는 등의 질문을 했다. 이에 이 의원은 "4자 필승론은 패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이었는데 아쉽다" "결국 사회변화 운동이 선거라는 방식을 통해 이뤄질 것이기 때문에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등의 답을 했다.
면접이 끝나고 노 전 대통령은 자신보다 20살 가까이 어린 이 의원에게 "나는 정치를 잘 모른다. 나를 역사 발전의 도구로 써달라"고 말했다. 당시 이 의원은 23살이었다. 그는 이 일화를 '미스테리한 일'이라고 회상한다.
이 의원은 1988년 최연소 보좌관으로 국회에 입성한다. 노 전 대통령은 그에게 보좌진 구성의 전권을 줬고 그는 가까운 선배들을 불러모았다. 같은 해 11월 열린 이른바 '5공 청문회'에서 노 전 대통령은 스타 국회의원으로 발돋움한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 삼총사'로 불렸다. 당시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은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이상수 의원의 보좌관은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였다. 이 의원은 당시 3개 의원실이 모여 '합동작전'을 벌였다고 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노 전 대통령이 낙선하고 같은해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 캠프에 뛰어들었지만 역시 패배한다. 당시 영남에서 김영삼 후보에게 몰표가 나오자 호남의 지지자들이 한밤중에 캠프로 전화해 "뭐 이런 선거가 다있냐. 전라도에서 애를 많이 낳는 수 밖에 없냐"며 울었다고 한다. 그 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영·호남 지역갈등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선 노 전 대통령이 당 최고위원 선거에 나가야한다고 판단했다. 1993년 3월 치러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노 전 대통령은 원외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선출된다.
그즈음 이 의원도 덩달아 상황이 나빠지자 친척이 "너 노무현 따라다니다가 굶어 죽는다"며 목돈을 줬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의원은 그 돈으로 종로구 인사동에 '소꿉동무'라는 음식점을 차렸다. 종로구 당원들 밥값이라도 줄여보자는 뜻에서였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을 설득하는데 성공했고 그는 1998년 종로구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이듬해 노 전 대통령은 이 의원을 비롯한 참모들에게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겠다고 선언한다. 2000년 16대 총선을 부산에서 출마하기 위함이다. 당선된지 1년 만에 지역구를 박차고 나가겠다고 하니 이 의원과 주변 사람들은 극구 말렸다. 며칠을 실랑이했지만 노 전 대통령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어느날 아침 노 전 대통령은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며 "나는 짐싸서 부산으로 내려간다"고 못박았다.
이 의원은 "다들 '통촉해 주시옵소서'라는 분위기였다. 근데 다들 그게 또 노 대통령의 매력이라고 느껴 따라 내려갔다"며 "저래서 노무현이란 ‘마수'에서 못 빠져나오는구나"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결과는 또 낙선이었다. 12년 동안 6번의 선거에서 2승 4패였다. 부산에서만 3번을 졌다. 이 의원과 참모들은 남은 돈을 긁어모아 부산 곳곳에 '이제부터 시작입니다'라고 쓰인 플랜카드를 붙인 뒤 서울로 올라왔다. 그즈음 '바보 노무현'이란 별명이 붙었고 '노사모'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노 전 대통령은 낙선 후 2000년 8월부터 8개월 간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낸 뒤 2001년 12월, 16대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대선 후보를 놓고선 '이인제 대세론'이 퍼져있었다. 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1~2%에 불과했다.
이인제 전 의원이 사무실을 얻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 의원을 비롯한 참모들은 "이인제보다 더 큰 사무실을 빌려야한다"며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금강빌딩의 한 층을 통째로 빌린다. 이 의원을 비롯해 안희정 전 충남지사,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백원우 민주연구원 부원장, 서갑원 전 의원 등이 여기서 일했는데 이후 '금강팀'으로 불리게 된다.
이 의원에 따르면 참모들은 캠프 사람들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 1000만원씩 카드 대출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노풍'을 일으키며 경선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한 노 전 대통령은 대선에서 득표율 2.3%, 득표수 57만표 차이로 이회창 후보를 꺾고 당선된다.
젊은 나이가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당시 청와대 상황을 두고 이 의원을 주축으로 한 '386그룹'과 문희상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을 필두로한 '시니어그룹'이 마찰을 빚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통령의 인사에 관여하고 다른 비서실에 월권을 행사했다는 보도들이 나왔으나 본인은 부인했다.
2004년 17대 총선서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 태백·영월·평창·정선 지역구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한다. 당시 현역의원이었던 김용학 한나라당 후보를 꺾고 46.7%의 득표율로 당선된다. 국회에 입성한 그는 청와대에서 함께 활동했던 이른바 '친노직계' 동료 의원들과 함께 '의정연구센터'라는 연구모임을 만든다.
이 의원을 비롯해 당시 서갑원, 백원우, 이화영 등이 참여했다. 의정연구센터는 진보정당 연구모임임에도 불구하고 전경련 등 재계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였다. 입법활동으로는 제정법인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을 만들어 통과시켰다. 당직으로는 기획담당 원내부대표를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이 의원은 2008년 18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2009년 3월 이른바 '박연차 게이트'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구속된다. 그리고 수감 중이던 5월 23일 영등포구치소에서 노 전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듣게된다. 구속집행정지를 신청해 사망 4일 뒤인 27일이 돼서야 빈소로 향할 수 있었다. 그는 구치소를 나서며 "무슨 낯으로 영정을 봐야할 지 모르겠다. (노 대통령이) 너무 불쌍하다"며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2009년 9월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1억4000만원을 선고 받는다. 재판부는 이 의원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10만 달러를 수수했다고 판단했다. 이 의원은 곧장 항소한다.
이듬해인 2010년 제5회 지방선거에 강원도지사로 출마한다. 강원도는 전통적으로 보수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민선 1기는 최각규 전 지사가 자민련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고 2~4기는 김진선 전 지사가 한나라당 후보로 내리 3선을 했다. 그러나 이 의원이 이계진 한나라당 후보를 꺾고 당선되며 파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당선 1개월만에 열린 2심 재판에서 또 다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고 도지사 직무가 정지됐다. 2011년 1월 대법원은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 의원은 지사직을 잃고 2021년까지 피선거권도 잃게 된다.
이 의원은 "박연차 회장이 1심 재판 후 연락을 해와 2심 재판에 출석해 증언을 번복하겠다고 했다"며 "(그러나) 검찰이 박 회장의 출석을 거부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야인으로 돌아간 이 의원은 2011년 7월 중국으로 향한다. 칭화대 공공관리대학원의 객좌교수로 임명돼 2013년까지 강의를 했다. 이 의원은 이 시기 중국 관료와 학자 다수를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한 내용을 바탕으로 책 ‘중국에게 묻다'를 펴냈다. 인터뷰 대상은 중국 공산당 최고지도부가 1~2개월에 한번꼴로 실시하는 '집체학습'에서 강연한 관료, 학자들이었다.
이 의원은 "중국 지도자들이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게된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2016년부턴 민간 싱크탱크인 여시재에서 부원장을, 2017년부턴 원장을 지냈다.
21대 총선을 4개월 앞둔 2019년 12월 30일,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세 번째 특별사면을 단행한다. 이 의원도 포함됐다. 10년의 족쇄가 9년 만에 풀렸지만 당겨진 1년은 기회였다. 즉각 총선 출마 관측이 쏟아졌다. 그는 "노 대통령 서거 후 10년간 자신을 되돌아봤다"면서 정치 복귀에 대해선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당시 당대표였던 이해찬 전 의원이 그에게 공동선거대책위원장직을 제안한다. 이 의원은 이를 수락하고 강원 원주갑 지역구에 출마한다. 9년의 야인 생활을 마치고 정계에 복귀한 것이다.
이 의원의 당선과 함께 민주당은 강원도 9석 중에 3석을 확보한다. 민주당은 그가 마지막으로 출마한 18대 총선 이후 강원도에서 19대 총선서 단 한석도 얻지 못했고 20대 총선에서도 한 석을 얻는데 그쳤었다. '이광재 효과'를 거뒀다는 평가가 나왔다.
2020년 12월 이 의원은 책 ‘노무현이 옳았다'를 출간했다. 노 전 대통령이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자신이 구상한 정책들을 제시한 책이었다. 이 의원이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소환하자 본격적인 대선 행보에 나선 것이란 평가가 나왔다. 그리고 그는 "차기 대선의 시대 정신은 '따뜻하고 강인한 대한민국"이라며 "대통령의 자격과 역량이 있는지 돌아보며 대선 출마를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권선 이재명 경기도지사, 이낙연 민주당 대표를 제외한 제3후보론이 제기되고 있다. 이 지사는 당의 주류인 '친문'과 멀고 이 대표 역시 '사면 논란'으로 동력이 약해진 상황이다. 아직까지 이 의원의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는 1~2%에 머무는 수준이다.
그러나 '원조 친노'라는 점에서 '친문' 지지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기 때문에 잠재력이 있다. 친문 의원들 사이에서도 이 의원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 한 친문 의원은 "젊은 동시에 준비된 지도자가 필요한데 그런 면에서 이 의원은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평가했다. 이 의원은 친문 의원 50여명이 소속된 싱크탱크 '민주주의 4.0'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 의원은 당직을 맡거나 뚜렷한 대선 행보를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를 돕는 그룹은 아직까지 수면 위로 나타나지 않은 상황이다. 여권 내에선 참여정부 출신 인사인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 맹성규 의원 등이 그를 돕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부산 친노'인 박재호, 전재수 의원도 이 의원와 교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1. "윤석열 검찰총장의 최근 언행은 대단히 부적절한 정치 행위. 퇴임 후 현실 정치에 참여하려는 수순으로 볼 수밖에 없다." (2021.03.03,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 페이스북 글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은 부패완판(부패가 완전 판치게 된다)' 발언에 대해 정치 행위라고 비판하며)
2. "미국 국무부에서 한반도 과(課)를 찾으니 저 끝에 있는 사무실에 가라고 하더라." (2021.03.02,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미국 국무부에 방문한 일화를 소개하며 미국에서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팀의 위상이 낮다는 것을 느꼈고, 미국의 여야 정치인에게 한반도 위상을 키워야겠다며)
3. "북한을 베트남으로 만들겠다는 큰 구상을 갖고 북핵 문제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2021.03.02,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 더불어민주당 의원 모임 '민주주의 4.0'이 기획한 한미의원 대화에서 북한 문제와 관련하여)
4.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명예롭고 안정된 삶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2021.03.01,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 블로그 글에서 친일 자산을 회수해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돌려줄 것을 촉구하며)
5. "노 전 대통령의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민주당 부산시당 미래본부장직 맡았다." (2021.02.22,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 <부산일보>와의 통화에서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당선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6. "주식 소수점 거래로 국민 다수가 주주가 되는 국민 주주 시대를 열자." (2021.02.14,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 <머니투데이> 더 300(the300)과의 인터뷰에서 자산 양극화 극복 방안으로 주식 거래의 최소 단위를 1주에서 소수점으로 낮추는 방식인 '주식 소수점 거래'를 설명하며)
7. "정글자본주의, 정글사회를 넘어 더불어경제, 더불어사회로 가자." (2021.02.08,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 '더불어경제, 더불어사회'를 주제로 한 국회 사회·교육·문화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8. "과학적이지 않은 정치 논리가 앞서가게 되면 결국 우리가 어려워지게 된다." (2021.01.26,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 국회에서 열린 '공항 출입국 신속 PCR(유전자 증폭) 도입' 토론회에서 방역과 경제 모두 성공하기 위해선 정치와 과학이 만나야 한다며)
9. "'친문' '친노'가 누굴 띄우고 패거리 정치를 하는 시대는 이제 먹히지 않는다." (2020.12.29,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특정 사람을 중심으로 몰려다니면 아무것도 될 수 없다'며)
10. "윤총장 징계는 불가피한 결정." (2020.12.16,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 YTN라디오 '황보선의 출발 새 아침' 인터뷰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의 징계 결정에 대하여)
11. "나는 좋게 말해 중도, 나쁘게 말해 회색분자." (2020.12.11,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경수 경상남도지사가 징역을 선고받은 뒤, 새로운 대권 주자로 '이광재 등판론'이 대두하는 것에 대해서)
12. "추 장관도 그렇고, 윤 총장도 그렇고 대통령에 누가 되지 않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2020.12.03,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 추미애 법무부 전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간 갈등에 대하여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13. "어떤 자리든 국민의 삶이 나아지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로 쓰였으면 좋겠다." (2020.12.02,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 의원의 저서 <노무현이 옳았다>에서 자신의 정치, 경제, 교육 포부를 밝히며)
14. "친노, 친문 그런것보다 결국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권력에 의미가 있다." (2020.11.09,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 YTN 라디오 '출발 새아침' 인터뷰에서 '향후 대권에 도전할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며)
15. "30대는 정도전처럼, 40대는 이성계처럼." (2010.03.01, 이광재 강원도지사, 2010년도에 이 의원이 출판한 책 <이광재 이력서>의 부제목)
[이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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