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은 '살아생전 장례식'?" [서영아의 100세 카페]
베이비붐 세대의 대규모 은퇴를 앞둔 2000년대 일본에서는 ‘정년연구 붐’이라 할 정도로 퇴직과 정년을 화두로 한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꼽을 수 있는 베스트셀러만 해도 여럿이다. 제목만 소개하자면 ‘마음의 정년을 극복하라-직장인 40세, 부업(副業)을 권함(2015년)’ ‘(있을)장소가 없는 남자, (쓸)시간이 없는 여자(2015)’ ‘정년여성(2015)’ ‘정년후(後), 50세부터 삶의 방식, 끝내는 방식(2017)’ 등 정년을 위한 마음의 준비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이 있는가 하면 ‘정년 고래(2001)’ ‘외로운 배(孤舟·2013)’ ‘끝난 사람(2015)’ 등 정년을 맞은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도 있다.
이런 책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지적하는 게 있다. 정년이라 하면 처음에는 자산관리 등 노후의 ‘돈’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지만, 실제 정년 후를 겪은 사람일수록 삶의 활력과 즐거움, 보람을 찾아 헤매는 수요가 많더라는 것이다. 그만큼 노후에 닥치는 고독과 무료함, 우울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얘기다. 각자 준비 태세에 따라 60세 이후 주어지는 8만 시간(90세까지 생존하는 것을 가정할 경우 실제 활동 시간)은 공포의 시간이 될 수도, 풍요로운 결실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솔직해질 수 없는 정년퇴직자의 속내
회사와 직장인 관련 책을 많이 쓴 구스노키 아라타(楠木新)는 일본 최고의 생명보험회사 경영관련 부서에서 일하며 50대부터 집필을 시작했다. 60세 정년 후에는 책 쓰고 강연 다니는 ‘비즈니스평론가’로 전업했다.
수많은 퇴직자와 예비 퇴직자를 만났지만 정년 퇴직자의 경우 속내를 제대로 털어놓는 사람이 없어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다”느니 “백수가 과로사한다”며 별로 바쁠 것 없어 보이는 일상에 대해 큰소리로 떠벌이는 사람은 많아도 정년 퇴직자가 겪는 당혹감과 미묘한 심리 변화, 행동의 변화를 진솔하게 고백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어쩌다 적나라한 속내를 털어놓는 사람은 한바탕 나락에 빠져 허우적대다 벗어난 경우였다. “지금은 극복했지만 전에는 이랬다”는 식이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어렵게 발굴했다는 사례 한 토막을 예로 들자면 “출근을 하지 않게 되니 밤낮이 바뀌고 요일 감각이 사라졌다. 무기력해지고 TV 앞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나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다…”. “집안에 내가 머물 장소가 없다”거나 “할 일이 없는데 자꾸만 초조해진다”는 사람, “싫은 상사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더라”는 사람도 있었다.
진솔한 육성 채록(採錄)이 힘들기 때문인지 소설의 픽션 스토리가 더욱 생생하게 퇴직자의 마음을 보여준다. 이런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됐을 뿐 아니라 소위 ‘정년소설’이라는 장르까지 형성되는 분위기다.
○ “높이 올라갔을수록 추락의 고통은 크다.”
개인적으로는 일본 지방신문에 연재됐다는 소설 ‘끝난 사람’이 충격적이었다(한국에도 번역본이 나와 있다). 소설의 형식을 빌어 정년 퇴직자의 구체적인 속내가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소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건 완전 생전 장례식이구만.”
주인공이 만63세로 정년퇴직하는 날이다. 업무가 끝나는 시각은 재깍재깍 다가온다. 퇴근 시각에 맞춰 방을 나와 건물 입구에 나서면 사원들이 죽 늘어서 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며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여직원들이 내미는 꽃다발과 선물가방.
건물 앞에는 회사에서 그날 하루만 내주는 고급 세단차가 대기해 있다. 몸을 구부려 차에 타면 직원들이 차를 둘러싼다. 장례식에서 조문객들이 영구차를 둘러싸고 마지막 작별을 하듯. 세단이 미끄러지듯 출발하자 그는 고개를 돌려 회사 쪽을 물끄러미 본다. 이미 아무도 없다.
집에서도 가족들이 마련한 파티를 마친 뒤 잠자리에 드는 그는 내일 당장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난 ‘끝난 사람’이 된 거야…”.
○“자신의 과거 영광과 싸우지 말라.”
어디부터 잘못됐을까. 승승장구하던 회사 내 행로가 삐끗한 이래 이해할 수 없이 찾아오는 모멸의 순간들과 맞서며 그는 날마다 어디부터 잘못됐을까를 곱씹는다. 회사 생활은 49세를 기점으로 급전직하했다. 명문대 출신으로 일본 최고의 은행에서 임원 승진 유력 후보로 꼽혔다. 그런데 승진 최종 경쟁에서 고배를 마셨고, 사원 30명의 자회사로 파견 발령을 받았다. 그간 밤낮없이 뛰며 쌓아온 실적과 인맥이 모두 무용지물이 됐다.
처음에는 본사 복귀를 꿈꾸며 성과를 내보려 애쓰지만 아무도 그의 성과를 원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게 된 그는 마지막 자존심으로 2년간의 고문직 제안을 거절하고 자회사의 대표이사 전무로 정년을 맞았다. “흩날리는 벚꽃도, 남아있는 벚꽃도, 어차피 지는 벚꽃”이라면서.
하지만 불완전 연소로 끝난 회사 생활에 대한 미련은 정년 이후로도 꼬리를 물었다. 소설은 “난 저런 사람들과 다르다”거나 “난 죽지 않았다”며 좌충우돌하는 주인공의 행보를 그려낸다. 자신의 과거 영광과 싸우며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갈등에 겉돌던 그는 오랜만에 들렀던 고향에서 희망을 찾아낸다.
○“인생 후반전으로 갈수록 모두 비슷해진다”
66세인 그가 귀향을 준비한다. 이기적이기만 했던 자신을 무조건 따뜻하게 맞아주는 시골의 노모와 “평범한 아이들”이라며 멀리했던, 하지만 자신을 스스럼없이 받아주는 고향 친구들 품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어릴 적 친구들과 지역사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늙은 노모를 모시며 지낼 생각에 설레는 그는, ‘끝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베이비붐 세대인 작가 우치다테 마키코(內館牧子)는 환갑을 넘기면서 정년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고 했다. 부쩍 늘어난 동창회에 나가보면 “뛰어난 수재도, 엄청난 미인도, 환갑과 정년을 지낸 뒤 만나면 다 비슷비슷해져있더라”는 것. 젊은 때 화려하게 활동한 사람이건, 불우한 회사 생활을 한 사람이건 정년 후에는 ‘그냥 보통사람’이 됐다. 인생 막바지에 가면 착지점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
○“늘 세상과 연결돼 있으라”
한국인의 수명은 1960년 51.23세(UN 통계)에서 2018년 82.7세(보건복지부 기대수명)로 불과 50년 사이 30여 년이나 늘었다. 어찌 보면 지금은 급격한 변화 속에서 몸은 오래 살게 됐지만 그 내용은 채우지 못하는 과도기라 할 수 있다.
100세 카페의 기사에 대한 독자 반응에서 실버세대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나와 처지가 다른 남에 대해서는 모진 태도를 취하고 세대 간의 갈등 구도를 가져다놓는데 익숙해져 버렸다. 하지만 나의 부모, 할아버지, 할머니가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행복해야 나도 그런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게 아닐까.
오늘도 누군가가 오랜 세월 함께 했던 조직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세상 속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의 마음을 잠시나마 헤아려보고 자신에게도 언젠가 닥쳐올 그 상황을 상상해보고 준비하는 자세를 갖는다면 이 또한 성장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 |
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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