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 아기 부모님들 힘내셔야 합니다"
아기가 몸을 못가누거나 발작을 하면 부모는 가슴이 타들어가고 애간장이 녹는다. 며칠 밤새 인터넷을 찾아서 유명하다는 의사를 찾아가도, 3~5분 진료 탓에 궁금증을 못 풀고 진료실을 나설 때 가슴이 더 무거워지곤 한다. 소아과에서 뇌전증, 근위측증, 발달지연 등 발달성 뇌질환을 전문으로 보는 의사가 드물어 환자가 몰리기 때문이라는 걸 이해해도, 답답하고 무력해서 더 가슴 아프다.
성균관대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이지훈 교수(51)는 가슴 아픈 부모가 이렇게 또 한 번 가슴앓이를 하지 않고 기운을 차리도록, 발달성 뇌질환 아기들의 치료뿐 아니라 부모의 가슴까지 달래주는 의사다. 인터넷에는 이 교수에게 고마워하는 글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처음 병원에 가서 스마트 폰의 메모를 보며 궁금증을 물어보려고 하는데 전화기를 달라고 하더군요. 메모 하나하나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증상을 자세히 보더니 가족처럼 걱정하며 고민하는 모습에 감동 받았습니다."
"회진 때마다 밤새 증세에 대해 자상히 들어주고, 질문을 되풀이해도 하나하나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줬어요. 입원 사흘 째 아침에 회진하러 들렀고 오후에 검사결과가 나와서 다음 날 아침에 설명을 해주시기를 기다렸지요. 그런데 저녁에 선생님 혼자 급히 올라와 저희가 궁금한 내용을 어떻게 알았는지 상세히 설명해주며 안심시켜 주셨어요."
"아기가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었는데, 면회 시간이면 어김없이 꼭 와서 아이 상태를 친절하게 말씀해주셨어요."
이 교수는 발달성 뇌질환 아기를 제대로 치료하기 위해서 부모와의 대화가 핵심이라고 믿는다. 처음 진료실에 왔거나 특별한 상황이 생긴 아기의 부모에겐 진료시간을 조절해 20분 이상 설명한다. 학생들에게 강의하듯, 슬라이드 10여장을 준비해서 보여주면서 부모가 이해할 때까지 아기의 상태와 치료법에 대해서 알려준다.
또 보호자가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를 보고 "이런 치료법에 대해서 본 적이 있느냐?"고 문의하면, 자신도 찾아보고 자세히 의견을 알려준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해외의 좋은 사이트를 알려줘 참고토록 한다. 뇌전증은 발작이 생겼다가 괜찮았다가 반복하기 때문에, 엄마가 아기의 발작 때 경기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오면 함께 보면서 대책을 찾는다.
이 교수는 이처럼 국내 병원 문화에 '친절'을 퍼뜨린 삼성서울병원에서도 대표적 친절의사로, 2019년부터 병원 환자행복팀장을 맡아 자신의 환자뿐 아니라 병원 전체 환자의 애로사항을 풀어주고 있기도 하다.
이 교수의 성실하고 친절한 진료는 난치성 뇌질환 때문에 청소년 때까지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거나 정상생활이 불가능할 것 같던 숱한 환자들과 부모들에게 '기적의 선물'로 이어졌다. 이 교수의 진료실인 '소아신경과 3번 진료실'에선 매년 대학생 20여명을 배출시켜, 병원에서 '3번방의 기적' 또는 '일원동 입시명문'으로 불린다. 이 교수의 '진심 진료'는 부모의 가슴에 그대로 전해져서, 심지어 안타깝게 떠나보낸 아기의 부모도 감사 인사를 할 정도다.
"최선을 다했지만 출산 때 심한 뇌손상으로 힘들게 버티던 한 아기를 세 돌 무렵 떠나보내야만 했습니다. 아기의 부모께 미안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의사로서의 한계 때문에 무기력해졌는데, 부모는 장례를 치르고 인사를 왔습니다. 2년 뒤 엄마가 갓 낳은 딸을 안고 진료실에 찾아왔어요. 순간, '혹시 둘째에게도 문제가 있나, 내가 유전요인을 놓친 것은 아닌가' 걱정했는데 '건강한 아기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감사해하더군요. 제가 더 고마웠습니다. 속절없이 떠나보내야 했던 아기들이 눈에 밟히기도 했고…."
이 교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 탄광에서 봉사활동을 한 의사 출신 소설가 아치볼드 조지프 크로닌의 자전적 소설 '성채'를 각색한 TV 드라마를 보고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고,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본과 1학년 때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소아청소년과의 '열린 의사' 정해일 교수가 지도교수가 된 것은 행운이었다. 정 교수는 제자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면서 방학 때면 유전자연구실에서 공부하게끔 했다. 이 교수가 인턴 때 정신의학과, 신경의학과 등을 놓고 장래에 대해 고민할 때 정 교수가 스쳐 지나가면서 던졌다. "자네, 소아청소년과 올 거지?" 그것으로 이 교수의 미래는 정해졌다.
이 교수는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3년차 때 소아신경과를 선택했고, 전공의를 마치고 강원 평창군과 철원군의 보건소에서 공중보건의사로 근무한 뒤 서울대병원에 복귀했지만, 모교에서는 자신이 들어갈 교수 자리가 없었다. 이 때 삼성서울병원 소아신경과에서 의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왔다.
삼성서울병원에는 딴 세상이 있었다. 병원 전체가 친절을 강조하는데다, 소아신경과 스승 이문향 교수는 미국에서 진료하다 온 명의여서, 환자 중심의 진료가 몸에 배어 있었다. 스승은 "태평양을 가운데 두고 샌프란시스코와 서울의 진료가 다르면 안 된다"면서 환자를 위한 최선의 진료를 강조했다. 스승은 제자에게 환자와 소통하는 법에 대해서 철저히 알려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진료의 고갱이에는 아기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가장 좋은 길을 찾고, 나머지는 거기 맞추도록 가르쳤어요. 부모가 잘못된 지식으로 고집을 부리면 진심을 다해 끝까지 설득해 왔습니다. 희귀난치병 아기의 부모는 닥터쇼핑을 하거나 근거 없는 치료법에 빠지기가 쉽지요. 부모를 탓할 수만은 없어요. 치료법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고 치료 기준에 대해서 여러 번 설명하면 부모도 결국 아기에게 가장 이로운 길에 따릅니다."
이 교수는 조교수 때인 2013년 소아 뇌 연구의 세계적 대가인, 미국 하버드대 보스턴어린이병원 크리스토퍼 월시 교수의 문하로 연수를 갔다. 이 교수는 신경유전학을 공부하면서 월시 교수에게 요청해 매주 한 번 진료실에 들어갔다. 월시 교수가 보호자에게 "한국에서 온 의사인데 함께 진료 봐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얻고 아기를 볼 때 삼성서울병원에서의 처방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며 안도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이듬해 귀국해서 난치성 뇌전증을 비롯한 희귀난치질환의 유전자를 찾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삼성유전체연구소와 함께 발달성 뇌질환에 대한 유전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지난해에는 이지원 교수와 함께 자기공명영상촬영(MRI) 검사로는 정상이지만 뇌전증이 발병한 아기의 혈액 3㏄를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법'으로 검사해서 50%에게서 원인 유전자를 찾은 결과를 국제 학술지 《분자유전학과 유전체의학》에 발표했다.
이 교수는 부모가 낙담하고 힘들어하면 자신도 가슴이 무거워진다. 아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부모인데, 숱한 부모가 자기 탓이라고 상심하며 눈물을 삼킬 때 '부모가 힘을 내야 아이를 제대로 치료할 수 있다'며 힘을 북돋워줘 왔다.
환자가 청소년기에 들어서 약을 안 먹거나 일찍 안 자고 게임이나 채팅하며 밤새우면 어머니의 눈물에 대해서 일러줘서 생활을 바로잡는 데에도 신경을 쓴다.
이 교수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도 부모 사랑을 일깨운다. 전공의들에게 뇌전증 아기가 대발작하는 동영상을 틀어주고 관찰케 한 다음 전공의들이 아이의 고개 각도, 팔다리 방향 등의 신체 상태를 메모하는 것을 지켜본 뒤 꼭 이야기한다.
"동영상에서 혹시 아기 옆에 있는 어머니의 표정을 보셨나요? 타들어가는 가슴, 안타까운 심정이 서려있는 얼굴을. 환자 증세뿐 아니라 부모의 아픔도 함께 보살피는 의사가 돼야 합니다."
이성주 기자 (stein33@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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